[희망], 대체 그들의 희망이란 게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고 했던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 변화가 주체의 의지로 인한 것이던 객체의 강압에 의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그 모든 변화를 아울러 적응이라 부른다.
인간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 중에 이야기만한 것도 잘 없다. 인간의 혀가 동물과는 분명히 다른 기능을 갖고부터 이야기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생산되었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따끈따끈한 신조어도 결국은 이야기의 힘에 대한 주목이 아니던가. 이야기는 인간을 변화시키고 적응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그 이야기를 싣고 있는 도구가 바로 책이니, 객체의 강압이 아닌 주체의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적응하게 하고 싶다면 - 물론 책 그 자체는 객체일 뿐이지만, 책을 선택하는 것만큼은 주체의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 , 책만큼 유용한 도구도 잘 없다.
양귀자가 1990년에 발표한『희망』을 읽었다. 상, 하로 나뉜 장편 소설이다. 시대적 배경은 명확치는 않으나 군부독제 시절인 듯하고, 공간적 배경은 나성 여관인데, 이 여관은 아무리 좋게 봐도 C급 여관을 넘어서지 못한다. 장소는 사람을 결정한다고 했던가. 나성 여관에 깃들어 사는 인물들 역시 딱 ‘나성 여관’급이다.
아내를 잃은 노동자, 고향에서의 부귀영화를 잊지 못하는 실향노인, 하나 남은 혈육마저 잃고 고아원에 맡겨지는 정신지체아, 기꺼이 계란이 되어 스스로를 바위에 내던지는 운동권 형, 돈밖에 모르는 어머니, 세상의 화려함에 눈멀어 망가진 누이, 가수를 꿈꾸다 정신 이상이 되어버린 재수생……. 재건축이 애당초 불가능해서 헐리는 것밖에는 대안이 없는 나성 여관마냥 소설 속 인물들도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는 새 삶의 가능성은 보이질 않는다. 『희망』속의 희망은 제목에서만 - 물론 작가는 작품 말미에 희망의 단서들을 배치하였으나, 앞선 절망들이 너무나 커서 희망으로 보이지 않았다 - 발견될 뿐이다.
책장은 잘 넘어갔다. 그러나 재미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근묵자흑 근주자적. 읽는 내내 지독히 우울했다. 어서 빨리 읽어버리고 이내 잊고 싶었다. 과연 이 책은 독자의 어떤 변화를 끌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암울한 시대의 우울한 군상을 통해 현실을 고발하고자 한 것이라는 데 있어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나, 그 암울함과 우울함으로 불편했던 내 심사는 현실 비판을 외면하고 싶은 사욕만을 가득 채워놓았다.
희망(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