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근통신] 정확한 사실과 빈틈없는 논리로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이유?
[01] 사람이 밟는 길 폭은 겨우 몇 치에 불과한데 왜 한 자가 넘는 언덕길에서 굴러 넘어지며, 한 아람이나 되는 통나무 다리에서 자칫하면 강물로 떨어지는가? 좁은 길, 좁은 다리에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사무친 말도 남이 믿어 주지 않고, 천지에 부끄럽지 않은 주장도 남의 수긍을 얻지 못할 때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내 언행, 내 사람됨에 여지가 부족한 까닭이다. 나를 비방하는 이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 점을 반성했다.(8쪽)
20년 전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예비대학이니 뭐니 하는 것들로 이미 동기들과는 꽤나 친해진 상태에서, 개강총회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학년 대표 - 당시 우리는 학년 대표를 '총때'라고 불렀다 - 를 맡은 친구가 인문대 학생회 소속의 한 선배를 데려왔는데, 그 선배가 근 30분의 시간을 횡설수설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잘 듣지도 않았을 뿐더러,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기억할 순 없지만, 학생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것 같다. 지금도 못마땅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불같았었다. 참다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남의 개강총회에 와서 너무 한 것 아니냐, 총때는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는 둥의 말을 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동기들의 호응은 전무했다. 심지어는 손님 불러놓고 그렇게 무안을 줘서야 되겠냐는 말까지 나왔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당시 나의 말은 상당한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논란에 있어서 나의 패배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다. 동기들은 총때를 하던 친구에 대해 대부분 호감을 갖고 있었고, 혼자만 잘난 나는 당연히 비호감이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이미 나있는 결론을 뒤집기 위해 흘리는 피땀은 대부분 무의미하다. 사람들은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대로 판단하고 이성으로 합리화할 뿐이다. 아무튼 당시의 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에 대한 혐오 내지 편견이 마음 깊숙히 자리잡게 되었다. 학생운동에 대한 혐오 내지 편견은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라졌는데, 이는 조정래의 『아리랑』『한강』『태백산맥』덕분이었다.
안자가훈에 나오는, 김소운 선생이 자주 떠올린 저 구절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그 모든 것은 내 언행과 내 사람됨에 여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말을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 나에 대한 비방의 말을 막을 예방책은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벗어난 것은 한 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 미학적으로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무력함 - 타인으로부터 동의를 받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 과 비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머님은 "남과 시비 가리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말씀을 평생을 두고 몸소 보여주셨다. 그 무언의 말씀은 결국 시비를 가리는데 힘쓰기보다는 언행과 사람됨의 여지를 넓히는 것이 보다 현명한 처사라는 말로 풀어내어도 무방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