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골 마을 전사(全史)
똥골마을 전사(全史)
1
섬마을 하면 으레 바다가 연상되겠지만, 바다가 없는 섬마을도 존재할 수 있다. 부산에서 손꼽히는 중심지인 서면에서 5분만 걸어가면 되는 곳에 섬마을이 있었다. 마을은 철도공작창의 끝없이 이어진 담벼락과 동천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동천에 놓인 콘크리트 다리였는데, 다리를 넘어서면 서면으로 곧바로 이어졌다. 하나는 철도공작창과 동천이 11자로 길게 이어지는 진입로였는데, 진입로를 지나면 범일동으로 곧바로 이어졌다. 두 진입로 모두 폭이 협소해서 차가 들어올 수 없었다. 때문에 마을에 아픈 아이라도 생기면 부모들은 아이를 들쳐 없고 큰 길로 허겁지겁 뛰어가 택시를 잡아야만 했다. 섬마을은 행정구역상 범천 2동이었는데, 흔히들 똥골 마을로 불렸다. 마을이 들어선 것은 해방 직후였는데, 그 전에는 서면 일대에서 나온 인분을 버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똥골 마을이란 명칭이 꼭 비방조로 붙여진 것은 아닌 셈이었다. 아무튼 이 마을은 큰 비가 오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방법이 전혀 없었다. 마치 풍랑이 거세지면 고립되는 섬처럼.
2
J가 똥꼴 동네를 섬과 같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82년이었던가? 에그니스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태풍이 부산에 상륙했다. 어찌나 비가 많이 내렸던지 동천이 범람해서 동천 변에 있는 집들을 삼키고, J가 살았던 뒷동네까지 넘어오려고 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J는 철이 없었다. 그래서 뭔가 긴박한 것 같기도 하였지만, 동천이 범람하면 스티로폼을 배 삼아서 타고 놀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였다. J의 아버지는 J를 포함한 가족들에게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를 하고 집을 나섰다. 마을 어른들과 대책을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J의 아버지는 「철도 공작창 담벼락을 허물고 피신할 거다. 귀중품만 챙겨서 넘어갈 준비해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우리의 철딱서니라고는 찾으려야 찾아볼 수 없는 J는 신이 났다. 이웃집 옥상 너머로만 보아왔던 금단의 구역에 들어선다니, 그것도 벽 뚫고. 이제 비가 10분만 더 내리면 그곳으로 가는 거다, 며 흥분한 J. J의 기대는 불행하게도, 아니지 다행히도, 좌절되었다. 비가 그쳤던 것이다. 벽이라도 깨었으면 한 번 넘어나 가보았을 터인데, 신기하게도 J의 아버지가 곡괭이를 들고 벽을 찍으려던 순간 비가 멎고 만 것이었다.「에∼이 씨.」라고 J는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런 소리를 내뱉을 만큼 철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바탕 휩쓸고 간 동천변의 거리에는 아직도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이 남아 있었다. 어느 집에서 떠내려 왔는지 알 수 없는 대야며 그릇이며 온갖 살림살이들이 둥실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J의 집은 아무 피해가 없었으나, 마을의 절반이 넘는 세대들이 동천 똥물의 지독한 악취를 씻어내는 데는 보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3
J가 살던 동네에는 J와 동값내기 아이가 둘 있었고, 두서너 살 아래 위로까지 본다면 일고여덟이 있었다. 땅따먹기·딱지치기·다망구(술레잡기)·오징어달구지·자치기·비석치기·구슬치기……. J는 그들과 해가 지도록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J는 그들 중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다. 동네 어른들도 다들 그렇게 알았고, 세상 부모들이 으레 그렇듯이 공부 좀 해라고 야단을 칠 때면 으레 비교 대상이 되어「ㅇㅇ처럼 공부 좀 해라.」라든지, 「ㅇㅇ처럼 똑똑하려면」이라는 잔소리의 「ㅇㅇ」자리에는 J가 들어가곤 하였다. 훗날 J는 부산대학교에 합격하게 되는데, 그와 같이 놀았던 어느 누구도 그만한 대학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니, 아니 변변한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으니,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똥골 동네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다는 말은 영원히 진실로 남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J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을을 통틀어보아도 10집이 못되는 주인집 중의 하나가 그의 집이었고, 따라서 유복하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좀 모자란 감이 있지만, 확실히 상대적으로는 유복했다. 게다가 J의 머리도 영 돌머리는 아니었으며, 어릴 때부터 「잘한다, 잘한다.」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자란 터라, 자존감도 상당했다. 결정적인 것은 소심해서 가출 한 번 해볼 용기도 없었고, 얼마든지 나쁜 길로 접어들 수 있는 동네 분위기에 휩쓸릴만한 용기는 더더욱 없었으니,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J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책이라는 것이 공부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으나, 이집 저집 다니며 빌려 읽은 책의 양이 초등학교 시절 이미 상당했다. 아무튼 J는 똥꼴 동네 우등생이자 모범생이었다.
4
J의 집은 1년 내내 부업을 하였다. J의 엄마가 무척이나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구슬 꿰기 같은 것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비닐우산을 만드는 일도 하였고, 티셔츠나 와이셔츠의 실밥을 따는 일은 거의 십 년이 넘게 하였다. J의 엄마가 부업을 그만 두게 된 것은 J가 장가를 가서 손자를 낳고서였으니, 30년 넘는 세월을 부업으로 가정경제에 보탬을 하였던 것이다. J의 아버지는 양복점에 다녔는데, 일류 테일러였다. 찬바람이 불면 한없이 바쁘다가도, 여름이 시작되면 두세 달을 일없이 지냈는데, 부창부수라던가, 부지런하기는 J의 엄마보다 더하였다. 여름철이 되면 J의 아버지와 방학을 맞은 J의 형제까지 합세하여, J의 집은 실밥 따는 공장처럼 되었다. J의 부모는 실밥을 따고, J와 J의 동생은 단추를 잠갔다. J의 아버지가「그놈들 손 되게 빠르네.」라고 칭찬이라도 해주면, J와 J의 동생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작업 진도를 올렸다. 옷 한 장에 30원이었고, 한번에 100장이나 200장을 받아오는데, 한 달 부지런히 하면 20∼30만의 소득은 너끈했으니, 80년대 중반에 가정 부업으로서는 꽤나 큰 벌이였다. J의 집에 마실 왔다가 실밥 따는 부업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도 간혹 있었는데, 대부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고, 혹은 일감을 받아 왔더라도 몇일이 못가 그만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밥 따기 부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탓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J의 엄마의 부지런함과 인내가 보통이 넘었던 것이다.
J의 어머니는 하루치 작업이 완료되면 손수레에 옷뭉치를 싣고 공장으로 갔다. 옷 한 장이야 무게랄 것도 없지만, 그게 100장이 되고 200장이 되고 보면 상당히 무거워져 평범한 여성 혼자서 운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럴 때면 J나 J 동생이 함께 가게 되는데, 보통은 그래도 3살 더 많다고 형인 J가 함께 가는 것이었다. J가 혹시나 공장에 가는 길에 같은 반 여자 친구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을 떠올리며, 「부모님 도와드리는 게 무슨 부끄러워할 일이냐.」「우리 집이 못 살아서 이걸 하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세놓은 방만 해도 몇 갠데.」라는 심사로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손수레를 밀고 다녔다. 가끔은 동네 어른이나 공장 직원들로부터 「그놈 참 착하다.」는 소릴 듣고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 시절부터 J는 「잘한다.」라든지, 「착하다.」라든지, 「영리하다.」유의 말을 먹으며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좀 삐딱선을 타자면 스스로의 언행에 도취되어, 쑥쑥 커갔다.
5
똥골 동네는 서면과 5분 상거에 있었다. 동네 주민의 80% 이상이 세입자였는데, 서면 유흥가에서 일하거나 부전 시장·서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유흥가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사장 소리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어디까지나 부엌에서 과일을 깎거나, 쟁반에 술과 안주를 나르거나, 호객 행위로 업을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변변한 점포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볼래도 찾을 수가 없었으니, 주로 자판을 벌이거나, 그러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은 손수레를 구루마라고 불렀으니 구루마라고 일컫기로 하자, 구루마에 채소며 잡화를 싣고 시장 한 켠에서 힘들게 벌어 먹는 경우가 똥골 동네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세 들어 사는 집이라는 게 방 한두 칸에 부엌 한 칸 딸리고 화장실은 공동으로 쓰는 낡아빠진 슬레트 건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면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과 달세가 한 달에 3∼8만 원 정도로 아주 쌌기 때문에, 그 형편에 그만한 편의를 누릴 곳은 똥골 동네 밖에 없었다.
세입자들은 보통 형편이 나아지거나, 형편이 더 못해지면 마을을 떠났는데, 형편이 나아진 이들은 좀 더 집같이 생긴 집으로 이사를 했고, 형편이 더 못해진 이들은 어쩔 도리가 없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파국으로 치달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초등학생이었던 J가 지나가는 소리로 들었던 떠나간 이웃의 이야기는 「누구네가 망해가지고, 아빠는 도망가고, 엄마는 시골 어딘가로 가고, 애들은 고아원에 맡겼다더라.」 「누구 아버지가 죽자, 얼마 안 있어 그 여편네가 재가를 하느라, 애들은 할머니 에게 맡기고 도망치다시피 떠났다더라.」 「누가 술 먹고 자빠져서 동사했다더라.」는 둥의 것이었다. J는 그 이야기들이 지척에 살던 사람의 것임에도 먼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들었다. 하기야 J가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나이도 아니었으니, 티브이를 통해 줄창 듣는 사건 사고 소식이나 엄마 입을 통해 듣는 사건 사고 소식이나 그게 그거였을 법도 하다. 어느 날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온 일이 한 번 있긴 한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6
앞서 말했다시피 J는 여느 똥골 마을 아이들과 달리 책을 애호하였다. 좀 특별한 점은 그래도 집집마다 한국사 만화 전집이라든지, 전래동화 전집이라든지, 세계 위인 전집 같은, 전집류가 하나쯤은 허름한 방 한구석을 밝히고 있었는데, J의 집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J가 그런 것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걸 사달라고 조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이집 저집 다니며 놀다가 흥미가 이는 책을 보면 「나∼, 저것 좀 빌려주면 안 돼?」라고 물었고, 대부분은 흔쾌히 빌려주었다. 간혹 자기가 보고 있다고 못 빌려준다던가, 「우리 엄마가 절대 빌려주지 말라고 했어.」라는 말을 듣는 경우도 있었는데, 무슨 불쾌한 감정까지는 아니었고, 재차 청하면 빌려 볼 수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번은 J가 책이 읽고 싶어 엄마에게, 「엄마, 나 책 한 권 사고 싶은데, 돈 좀 주면 안 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엄마는「그래?」하며 만 원을 선뜻 꺼내어 주시며, 「돈 남겨와야 돼.」라고 말을 했다. 만 원을 들고 동네 서점으로 달려간 J. J는 이 책 저책을 뒤적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래 오래 볼 수 있는 책이 뭐가 있을까?」라는 내용으로 요약되는 고민이었는데, 아마도 다시 책을 산다고 돈을 달라고 할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J가 그래서 고른 책이 바로 「식물도감」이었다. J가 무슨 식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로지 수많은 식물의 사진과 그 아래에 달린 작고도 무수한 글자들이 오래오래 볼 수만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J는 식물도감을 오래오래 보지 않았고, 그다지 재미도 느끼지 못했으니, 쇼핑 실패라고 판정을 내려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1년 쯤 지나 다시 돈을 받아서 산 책이「세계인물사전」이었다. 물론 이도 쇼핑 실패로 판정받아 마땅했다. 아무튼 J의 이러한 책 욕심은 평생을 계속되었는데, 대학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몽땅 책으로 바꾸는 일이 다반사였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용돈의 절반 이상을 항상 책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나이 40줄에 접어든 J는「집에 책이 많은 것 보다는 조금만 있는 게 나아. 책을 사랑하려면 책에 대한 갈증이 필요해. 갈증만 느끼면 그다음은 무슨 수를 쓰던 구해서 읽게 되어있거든.」이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7
똥골 마을 아이들의 용돈 벌이는 유별났다. 물론 소심하고 겁 많은 J가 기껏 한 용돈 벌이는 제 집 어른들이 마시고 모아둔 빈병을 파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마을에서 좀 까졌다는 애들의 용돈 벌이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았다. J도 한 번 따라 해볼까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은 한 번도 따라 해보지는 못했다. 이제 그 기상천외한 용돈벌이를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보자.
포장마차 훑기!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서면에 롯데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에 그곳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교인 부산상업고등학교와 부전국민학교가 담벼락을 맞대고 나란히 있었다. 똥골 마을 아이들 대부분이 부전국민학교를 다녔고, 부산상고 화장실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담배 연기를 보며 「와, 담배 핀다.」며 고함을 질러대었다. 물론 단 한 번도 선생이 와서 제지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아무튼, 부산상고 담벼락 아래에는 밤만 되면 수십을 헤아리는 포장마차들이 성업 중이었는데, 낮이 되면 장사만 하지 않을 뿐, 포장마차는 그대로 쭉 늘어서 있었다. 춘천집, 부산집, 뚱보아지매, 갈매기집, 하동집, 사랑방……. 뭐 그런 흔해 빠진 이름들이 쓰인 포장마차였는데, 수업을 마친 동네 아이들이 머리를 다리 사이로 집어넣고서 그 포장마차의 아래쪽을 쭉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밤에 취객들이 흘린 동전을 줍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 만 원짜리 지폐를 줍기도 하는 것이었다. 농촌 아이들이 허리를 굽혀 이삭을 주워 용돈 벌이를 했다면, 똥골 마을 아이들은 허리를 굽혀 현금을 줍는 용돈 벌이를 한 것이니, 썩 괜찮은 벌이였던 것이다.
(2013.05.21. 원고지 48.6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