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잘 모르는 아가씨의 늘씬한 다리를 예찬함

빈배93 2013. 6. 22. 06:30

   너무 두껍지도 않고, 너무 가늘지도 않은, 말 그대로의 아가씨의 ‘늘씬한’ 다리는 무엇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이힐(발에 변형이 일어나는 것은 내 알 바 아니고.)과 스타킹(더운 것도 내 알 바 아니고.)이 더해져야 하는데, 하이힐과 스타킹과 아가씨의 다리가 이루는 환상적인 조합이 있고서야 진정한 아름다움이 완성된다.(찬양받을지어다! 하이힐과 스타킹이여!) 이 완성된 아름다움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적·관계적 거리가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그 다리는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곤란하다. 관계적으로는 아예 모르거나 알아도 덜 가까운 사람이어야 한다.(잘 아는 사람일 경우에는 도덕적 관념이 끼어들어 일종의 죄책감을 부여한다.) 모든 조건이 구비된 다리는 신비한 미소의 <모나리자>보다도 괴로움으로 가득한 <고흐의 자화상>보다도 우월하다.

 

   인어 공주는 목소리를 잃는 조건으로 지느러미 대신 늘씬한 다리를 얻었다. 이는 물론 첫눈에 반한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저 늘씬한 아가씨의 다리를 보고 있자니, 인어 공주의 그런 선택이 늘씬한 다리 그 자체에 대한 선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초년에는 여성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중년에는 여성의 다리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노년에는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까? 더 내려갈 곳이 없으니, 다시 올라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육신을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노년이 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독자여, 필자를 너무 나무라지는 마라.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남성이 혹은 여성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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