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취의] 새로운 물음
-김남순,『정의를 위하여』, 동녁. 2016. 14쪽
나는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내 아이를 야단치는가? 확실히 심하기는 했다. 그 야단은 아이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전적으로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기엔 우습다. 그 야단이 아이를 변화시켰는가? 못 시켰는가? 변화시켰다고 믿고 싶다. 언성을 높이고 눈을 부릅뜨는 것이 교육적일까? 그렇게 야단쳐 놓고 이렇게 가슴 아픈 것은 무엇인가? 가슴이 아픈 것은 아이 때문인가? 나 때문인가? 물음 없는 나의 행동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위험하다. 정답이 없어도 물어야 한다. 묻는다는 것은 위험을 증가시키는 기능도 있지만 위험을 감소시키는 기능도 있다. 무엇에 대해 물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묻는 것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의 몇 구절만이 머리 한 구석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상당히 위험하게 살았고 동시에 상당히 안전하게 살았다. 묻고 또 물었던 적은 또 언제였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없다. 물음 없는 삶은 과연 나쁜 것인가? 모든 상황에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음이 많은 삶은 좋은 삶인가? 절대적인 강령이 있다면 편하겠지만, 절대적인 강령은 잘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이 중심에 있어야 하고, 인간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다. 수많은 현자와 석학들 또한 비슷한 말을 했다. 이 생각은 상당히 절대적인 강령일 수 있다. 그 물음이 인간을 위하고 사랑을 위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묻자. 끝없는 회의는 결국 회의로 끝난다. 나는 여기서 질문을 멈추고 행동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인간을 위하지도 못하고 사랑을 위하지도 못하는 물음이라면, 말자. 날카로워지고 불편해지기 위한 물음은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자.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사랑을 주기 위해, 묻자. 묻지 않는 삶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같다. 나는 내 삶의 브레이크를 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