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책을 베끼는 이유
빈배93
2019. 9. 4. 11:40
내 분노가 일어남은 때가 없고 계통이 없다. 몸 밖으로 뛰쳐 나온 맹수가 나를 집어삼키면, 나는 외롭고 불쌍한 악인惡人이 된다. 내 안의 맹수를 달래기 위해 불경을 정성껏 되뇌지만, 내 외곬의 심사와 얕은 절제로는 불음佛音도 무용지물이다. 분노에 무기력하게 굴복할 때마다, 부처의 가르침과 실천지침을 나는 회의한다.
분노가 치밀면 컴퓨터로 책을 베낀다. 내 안에 억눌러 놓은 분노가 맹수처럼 발광하는데, 작대기 몇 개 얽어 놓은 허약한 내 마음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다른 방도가 없어, 불경을 외듯, 기를 쓰고, 눈으로 손으로 책을 베낀다. 수백 쪽을 베꼈음에도 맹수도 나도 변함이 없다. 수만 쪽을 베껴도 변함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 나는, 책을 베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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