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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빈배93 2025. 6. 30. 09:37

건너편

 

○ 눈 한 송이의 의지가 모여 폭설이 되듯 시시티브이에 비친 풍경이 모여 교통방송의 '정보'가 됐다. 도화는 목, 교橋, 진津, 포浦, 골,굴窟 등의 이름을 외웠고 각 도로의 특징과 이력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간명하게 요약해 세상에 전했다. 도화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법을 존중했다. 수사도, 과장도, 왜곡도 없는 사실의 문장을 신뢰했다. '내부순환로 홍제램프에서 홍지문 터널까지 차량이 증가해 정체가 예상된다'거나 '올림픽대로 성수대교에서 승용차 추돌 사고가 났으니 안전 운행하시라'와 같은 말들을. 더구나 그 말은 세상에 보탬이 됐다. 선의나 온정에 기댄 나눔이 아닌 기술과 제도로 만든 공공선. 그 과장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다. 그것도 서울의 중심 이른바 중앙에서. 실제로 서울지방경찰청 건물은 조선시대 왕궁 중 하나인 경복궁 근처에 있었다. 서울에서 지방까지 거리를 계산할 때 시작점도 광화문이었다.(90)

 

 

침묵의 미래

 

○ 어느 민족에게 사랑은 접속사, 그 이웃에게는 조사다. 하지만 또다른 부족의 경우 그런 건 본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하여 아무런 명찰도 달아주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 '보고 싶다'는 한 음절로 족하다. 하지만 다른 부족에게 그 말은 열 문장 이상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다.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138)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 그 고생을 하고도, 막상 젖을 끊을 땐 아이에게 미안해 조금 울었다. 속이 후련한 한편 우리가 함께 보낸 한 시절이 비로소 끝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건 아마도 재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190)

 

○ 재이가 학교에 간 사이, 방 청소를 할 때마다 베개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속눈썹을 보며 재이가 여전히 '자라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느 유명한 탈옥 영화 속 주인공이 감방 벽을 조금씩 파낸 뒤 그 흙을 주머니에 담아 몰래 버렸듯, 재이도 자기 일부를 끊임없이 버리며 크고 있구나 하고. 재이에게 고마웠다.(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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