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당신은 한국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봤나요?

빈배93 2011. 6. 2. 06:00

[한국인의 힘] 1권, 이규태, 신원문화사, 2009년.

 

작년 7월에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재미있게 읽은 책이 있다. [이규태코너2003]이라는 재목을 가진 비매품의 책이었다. 책의 날개에 쓰여진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선일보에 40년 넘게 재직하며 6,072회에 걸쳐 <이규태 코너>를 썼는데, 그것이 국내 언론 사상 최장기 집필이었다고 한다. 기자 특유의 다양한 체험에 담백한 글솜씨가 매력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몇 일 전 다시 도서관에 들렀다가 새롭게 발견한 책이 [한국인의 힘]이었다. 한 번 좋은 기억을 남긴 작가를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다.그래서 선뜻 집어 들게 되었다.

 

자아는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서 비로소 정립이 된다. 곧 한국인이 갖는 특성은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정립이 된다. 저자는 기자의 신분 때문에 일반인이 가기 힘든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곳을 드나들었다. 게다가 한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도 보기가 쉽지 않은 각종 야사와 역사서들을 섭렵하였다. 통시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역사이전까지의 지적편력과 공시적으로는 5대양 6대주에 걸친 발걸음을 작자특유의 담백한 글솜씨로 우려내었으니 어찌 감칠 맛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은 크게 5개의 챕터로 구성되어있고 다시 챕터 하나에 10개의 독립된 이야기가 있다. 각 챕터의 주제를 소개 하자면 이렇다.

 

01 한국인의 따듯한 정 02 한국인의 끈기 있는 깡 03 한국인의 도도한 정신 04 한국인의 독특한 개성 05 한국인의 무한한 잠재의식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이래서 한국 사람은 안돼.”

한국사람이 대단하긴 대단해.”

한국사람은 혼자 있으면 잘하는데, 뭉치면 개판이야.”

 

쉽사리 듣고 하는 말이지만, 실제 한국인의 특성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고민을 해보았을까? 크게 보면 한국학을 전공한 나 조차 거기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적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보면, 그냥 어디서 들은, 신문에 난 단편의 기사들을 보고, 그냥 위의 세 말들 속에 구겨 넣은 생각이지 않을까? 이규태 기자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들을 수많은 예화들을 통해 풀어내며 광범위한 고찰을 하였다. 그리고 그 특성의 긍정적 활용에 대한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정서에 대해 폭넓은 사고를 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독 감명깊었던 작가 본인의 일화가 있어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면서 글을 줄인다.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어릴 때 호박에다 말뚝 박는 일이 왜 그다지도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헛간에 버려진 낫 토막을 들고 숲속에 가 세모꼴의 말뚝을 스무 개 남짓 만들어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인적이 드문 길가에 담 넘어 늘어뜨려진 호박이나 박에다 말뚝을 박았다.(중략)

 

   그런데 어느 날 이 성증의 스릴을 거듭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잊을 수 없는 내 일생의 충격적인 사건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할아버지는 볼기를 치거나 나무라지도 않고 나를 감자를 저장해두는 토방에 가둔 다음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문틈으로 스며드는 것으로 미루어 밖이 꽤 어두웠으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토방 문을 열었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할아버지는 나에게 나가자는 말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나는 앞서 걸어갔다. 몸뚱이 없이 머리만 있다는 무목 귀신이사는 공동변소를 지나 징검다리를 건너 산 쪽으로 갔다.

 

   약간의 밭과 뽕밭이 계속되다가 상여집을 지나갔다.할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으셨고, 이상한 짐승 소리는 끊임없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상여집에서 무슨 불빛이 어른거린 것만 같은 착각에 나는 그대로 발이 굳어 주저앉고 말았다. “할아버지……하고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었으나 막무가내로 소나무 무성한 산길로 몰아세웠다.

 

   늑대가 붉은 흙을 묻히고 숨어 있다고 해서 대낮에도 가기를 꺼리는 사래밭 굽은 목에서 다시 한 번 발이 굳었지만 할아버지의 재촉에 발걸음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늑대가 뒤따라올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되돌아보면서……. 얼마나 갔을까, 할아버지는 어느 무덤 앞에 이르러 나를 세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증조할아버지의 무덤이었던 같다

 

   꼼짝 말라고 일러놓고서 할아버지는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할아버지 없는 깊은 산 속의 공포는 무목 귀신이나 상여집이나 늑대보다 더 무서웠다. 할아버지가 나를 버려두고 내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를 뒤따라온 무목 귀신이며 늑대가 나를 가운데 세워 놓고 마냥 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지려고 할 때 할아버지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눈을 익혀 보니 할아버지의 손에는 굵직한 회초리가 네댓개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회초리를 내 곁에 놓더니 무덤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아버님, 불초자식의 손자가 남의 재물에 손을 댔사와 그 벌을 아버님 앞에서 받을까 하오니 하량下諒하옵소서.”

 

   허리를 편 할아버지는 무덤 상석床石 앞에서 자신의 두 바짓가랑이를 걷었다. 그리고 나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나에게 처음으로 분부했다. 회초리를 들어 할아버지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안 할게요……. 할아버지.”

 

   조상 앞에서 안 할게, 하는 법은 없어. 힘껏 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다.”

 

   겁에 질린 나는 회초리를 들고 할아버지 종아리에 갖다 댔다. 힘없는 나의 손놀림에 할아버지는 회초리를 홱 빼앗더니 나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후려치면서 이렇게 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약간 세게 치면 더 세게 치라고 나의 종아리에 시범을 보이곤 해서 차츰 그 강도가 세졌다. 마침내 회초리가 부러졌다. 두 번째, 세 번째 회초리도 부러졌다. 종아리를 치다가 얼굴에 튀는 물기를 느끼고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핏발이 터져 튀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다시 무덤에 엎드려 뭐라고 울면서 고하는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없을 만큼 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할아버지는 나를 앞세우고 산을 내려왔다. 그 동안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물론 나도 이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뒤 못된 짓이라고 두 번 다시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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