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부딪히며 찾아낸 슬로리딩 기법
1993년 겨울이었다. 부산에 있는 모 대학 한문학과에 합격을 하고, 미리 공부하고픈 마음에 경주에 있는 서당을 다니게 되었다. 잊지 못할 나의 첫 교재는 『소학小學』이었다. 훈장선생님의 교육 방법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루에 딱 세 문장만 가르쳐주고 그걸로 끝이었다. 당시 나는 '하루에 서른 문장을 배워도 시원찮을 판인데 이게 뭐야'라는 불만끝에 한 달 정도만에 그만 두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전통 한학 교육의 방법이란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한문학과에 입학하고서 그 어려운 한문 원서를 빨리빨리 봤다. 빨리만 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사서四書를 대학교 3학년 때던가 완독을 했다. 학점? 무지 잘 나왔다. 한문학과 4년을 다녀도 정규 수업시간에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四書의 3분의 1도 보기 힘든데, 어찌되었던 그리 빨리 완독을 하였으니 성적이 잘 나올 수 밖에.
그 뒤로도 '빨리 빨리 책 읽기' 병은 고쳐질 계기가 없었다. 대학원 가서도 '빨리 빨리'였고, 교편을 잡으면서 하는 독서도 '빨리 빨리'였다. 그래서 1,000권이 넘는 책을 읽고나서야 슬그머니, '그렇게 읽어서 남은 것이 무엇이냐'는 회의가 찾아왔다. 참∼빨리도 찾아왔다. 그게 작년이던가 재작년이던가 그렇다.
최초로 슬로 리딩을 위한 나의 시도는 『백범일지』로 시작되었다. 한 페이지도 남김없이 워드로 쳤고, 중간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서 주석을 달며 읽었다. 결과는? 뭔가 부족했다. 그 뒤로 1년 쯤 뒤에 다시 시도한 것이 『자전거여행』의 필사였다. 몇 일 전에야 결국 다 써내고야 말았다. 그때의 기쁨이란 '팔만대장경'의 판각이 끝났을 때 못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시작할 엄두가 안났다. 너무 힘들었다.
오늘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슬로리딩을 시작하였다. 이런 방법을 취해보았다.
첫째, 동시에 여러 책을 조금씩 읽는다. (오늘 읽은 것은『논어』 한 구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5 페이지, 『길가메시 서사시』10 페이지, 『나무야 나무야』 12페이지였다.)
둘째, 읽은 것들을 워드프로세서로 작성을 하고 필요한 부분에 주석을 달았다.
셋째, 프린트로 출력을 해서 다시 읽으며 밑줄을 긋고 간단한 생각을 썼다.
넷째, 그렇게 작업이 끝난 프린트를 다시 2∼3번 정독을 했다.
워드를 치며 책을 읽는 것에 비해 눈이 덜 아프다는 것이 장점이고, 필사하며 읽는 것 보다 책을 좀 더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게다가 적은 분량은 최소한 5번 정도 읽게 된다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단점은 컴퓨터와 프린터가 없으면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방법은 그다지 새롭지도 않다. 대학가기 전에 서당에서 배우던 그 방법과 너무도 흡사하다. 조금 배우고 많이 읽기! 그것이다. 결국 이런 독서법으로 돌아오는 데 18년이나 걸렸던 것이다. 앞으로도 독서법에 대한 연구를 몸소 실험하며 고치고 또 고칠테지만,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방법이 나올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모른다. 자다가 어느날 신의 계시를 받을지도. 물론 그 신이란 내가 바친 그간의 노력과 열정에 다름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