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산 여행기] 이기대二妓臺 도시 자연공원
다닐수록 갈 곳이 늘어가는 여행
평생을 부산에 살았어도 못 가본 곳이 참 많다. 가면 갈수록 못 가본 곳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난다. 이는 다닐수록 못 본 곳이 더 많이 인지되기 때문이다. 굳이 먼 곳을 찾아서 여행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어쩌면 평생 부산을 다녀도 다 봐내지 못할 듯하다. 지난 12월 12일에 남구 용호3동 산 25번지에 위치한 ‘이기대 도시 자연공원’을 다녀왔다. 처음이었다.
이기대의 명칭에 얽힌 사연
왜 이기대二妓臺일까? 「위키백과」에 실린 글을 보자.(언제나처럼 문장을 조금 손질했다.)
“이기대의 명칭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동래영지東萊營誌』에는 “좌수영 남쪽으로 15리에 ‘두 기생(二妓)’의 무덤이 있다. 때문에 이기대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민간 구전은 좀 다르다. 임진왜란 때, 두 기생이 왜장을 술에 취하게 한 뒤 껴안고 바다에 뛰어내렸기 때문에 이기대二妓臺 또는 의기대義妓臺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간구전은 저 유명한 의기義妓 논개의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하다. 이기대의 두 기생은 잠시 접어두고 논개의 이야기를 해보자. 논개는 무엇 때문에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동반자살을 했을까? 기생이라면 조선이라는 봉건 국가의 최하층민이다. 당연히 국가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입지 못했고, 심지어 기생이라는 견고한 족쇄만을 찼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조선을 위해 동반자살을 할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나는 논개의 이야기에 조작이 있다고 생각한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을 보면 논개가 동반 자살한 이유를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그러한 동반자살의 이유가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깝지 않은가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1593년 6월 김천일·최경회·황진·고종후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로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뛰어든 것은, 조선과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충절忠節’의 발로여야 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학살당한 수많은 양민 중에는 아마 논개의 피붙이나, 친한 이웃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나는 이해가 된다. 훗날 사당까지 새워가며 ‘논개의 충절’을 홍보한 것이 논개의 숭고한 순절에 금칠을 한 것이긴 하지만, 죽음까지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사족이지만 ‘논개’에게 안겨죽은 ‘게야무라 후미스케’는 저승에 가서도 그 가족과 천왕에 참 부끄러울 것이란 생각에 웃음이 난다. 사무라이가 폼나게 죽어야지, 기생 품에 안겨 죽었느니.
이기대에 얽힌 민간전승은 사실이 아닐 듯하다. 만약 사실이라면, 수령과 저 수많은 사대부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확실치는 않으나 자신이 다스리는 고장에서 효자나 열녀나 충신이 나오면 높은 고과점수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있겠는가. 마침 기생이 무덤이 있었고, 논개의 이야기 비슷한 것을 붙이면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해녀들의 삶의 터전, 관광객의 산책로
오후 3시쯤 찾은 이기대 공원은 하늘도 바다도 숲도 대지도 모조리 검푸른 빛깔이었다. 마침 더 차가워진 날씨까지 겹쳐서 음기陰氣가 자욱하였다. 해안을 따라 끝없이 펼쳐친 산책로를 걷다보면 유난히 강태공들이 많이 보였다. 왼편으로는 바다, 오른편으로는 장산봉의 숲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참을 가다보면 해녀막海女幕이 하나 보인다. 그 해녀막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곳은 해녀들이 해산물 채취를 위해 어구 보관, 잠수복 탈의 및 조업 후 휴식장소로 40여 년 전에 만들어져 활용되어 오던 것을 2005년 [이기대 해안산책로 조성사업]을 계기로 강한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정비 복원하였습니다. 전체적인 형상은 거북이가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이며, 머리 부분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갯바위이며 이를 중심으로 해녀들이 오랜 세월 파도와 싸워 얻은 경험과 감각으로 만든 것으로 현재까지도 10여 명의 해녀들이 해삼, 전복, 성게, 미역 등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여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해녀막에서 바라본 바다 저편에는 광안대교와 몇 십 층을 헤아리는 해운대의 고층빌딩이 우뚝하다. 해녀막 주변에는 낚시하는 사람,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이 가득하다. 해녀들의 삶의 터전인 해녀막과 해녀들 역시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비쳐진다. 같은 장소에서 누구는 먹고 살 것을 마련하느라 고단하고, 누구는 먹고 와서 노곤하다. 배 두드리며 산책해서 미안하고, 그녀들의 힘찬 물질에 경의를 표한다.
1993년 군인들로부터 시민들에게 돌아온 이기대 도시 자연공원은 환경 파괴 문제, 산책로 옆의 휴게소 특혜 시비, 산책로 확장공사 특혜 논란으로 얼룩져 있다. 그 상황 속에서 영화 『해운대』의 촬영장소로 유명해졌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이름 없는 두 기생과 이름을 알 수 없는 해녀들의 삶을 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