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膝], 가족을 위해서 무릎을 내어놓은 아버지
「슬膝」,『더블』, 박민규, 창비, 2010.
영화 [2012]년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엄청난 해일 앞에서 아기를 안고 침대에 누워 눈을 꼭 감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어머니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내 아이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혹은 문명이 모두 파괴된 세상에 나와 내 가족이 내던져진다면 나는 가족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소설을 만난다. 박민규의 「슬膝」이었다.
박민규는 『더블』이란 두 권의 단편 소설집을 통해 최근에야 알게 된 괜찮은 소설가이다. 20편에 가까운 소설 하나하나가 꽤나 흥미로우면서도 간단치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차후에 몇 편 쯤 더 『더블』에 실린 단편 소설에 대한 리뷰를 해야할 것 같다.
「슬膝」은 B.C. 17,000경, 현재의 함경남도 이원과 철산 지역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지독한 추위로 부족민들은 모두 떠나고, 주인공 '우'와 임신한 아내 '누'와 어린 자식들만이 차가운 동굴 속에 남겨진다.('우'는 '가족을 위해 어리석을 수 밖에 없는 아버지'란 의미로, '누'는 '자식을 위히 눈물 흘리는 어머니'란 의미로 나는 읽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우'는 가족을 위해 눈보라를 헤치며 사냥을 나선다. 사냥감은 아무리 찾아다녀도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거대한 코끼리(소설 속에서 '코끼리'라고 하였다. 시기상으로는 당연히 '메머드'이다.)와 조우하게 된다. 사투 끝에 패배한 '우'를 놓아두고 코끼리는 떠난다. 바위 틈에 끼인 발목은 빠지질 않는다. '우'는 기어이 돌칼로 무릅 아래를 잘라내고, 그 잘리어진 살점을 자루에 담아서 '춥고 어두운 눈 속'을 걸어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문명 세상'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고 싶었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지식인임을 증명하는 것인 양하는 세태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나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식인도 아니면서.) 하지만 이 문명이 우리에게 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잊거나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문명의 파괴적 성격과 시혜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균형을 이룰 때에야 온전한 비판이 가능하지 않을까?
'우'는 왜 그렇게 가족에게 집착을 했을까? 캐임브리지대 교수 앨런 맥필레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외로움과 고립감이 그만큼 덜하다고들 한다. 특히 사회 환경이 불안정할수록 가족이 유일한 보호막이므로 실제로 자식이 많을 수록 좋다." B.C. 17,000년 경의 불안정한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로서는 쉽게 짐작키 어렵다. 그러나 원시인은 원시인대로, 현대인은 현대인대로 사회의 불안정과 먹고 사는 힘겨움을 같은 크기로 안고 살아가기에 영 모를 것도 아니다. 작자가 원시인 사냥꾼 '우'와 그의 가족을 등장시킨 이유는, 아마도 가족에 대한 집착이 인간 본연에 내재된 것임을 말하려 함이 아니었을까. 아울러 온가족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숙명적 비애'를 드러내려함이 아닐까.
오늘날 결혼 제도가 급격히 약화되고 가족의 해체라고 할만큼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결혼을 하고 하지 않고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사항이 되었지만, 그로 인한 외로움과 고립감만큼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생각과, 외로움과 고립감을 벗어나는 댓가로 기꺼이 무릅 한 쪽을 내어놓는 아버지의 희생에 대해 생각해본다.
더블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