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아가고 싶은 미래를 그리는 것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문학동네, 2012.
지난 주초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지난 주말에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둘 다 고전古典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나는 왜 고전을 읽었는가? 10∼20%의 이유는 고전이 좋다고 해서였다. 정말로 나는 왜 고전을 읽었는가? 80∼90%의 이유는 누군가에 그 책을 읽었다고 으시대기 위해서 였다. ‘아직도’ 남에게 보일 것에 신경을 쏟고 있다. ‘아직도’라는 말을 쓰기에도, 나는 한참 모자란다. 내일도 모래도 한 번은 들었음직한 고전을 읽겠지만…….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다.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서 봤더라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명사名詞이다. 『연금술사』에서도 본 듯하고, 『브리다』에서도 본 듯하다. 그게 이름으로 쓰였는지, 지명으로 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줄거리에 익숙한 주인공의 이름이,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데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노인 산티아고가 홀로 거대한 청새치(길이 5.5m, 무게 700kg)를 잡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사투. 그리고 상어에게 그 청새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또 한 번 벌이는 처절한 사투. 그게 줄거리의 전부다. 등장인물도 없다. 전반부 후반부에 잠시 등장하는 ‘소년’과 이웃에 사는 어부들 정도다.
혹자의 평에 의하면 말년에 이른 헤밍웨이의 원숙함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라고 한다. 그 원숙함이란, 정신적인 부분과 작가로서의 필력을 모두 지칭할 수 있을 듯하지만, 아무래도 정신적인 부분에 큰 비중을 두고 이해해야 할 듯하다. 거대한 자연에 맞서서 결코 굴하지 않았던 노인 산티아고. 그러면서도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던 노인 산티아고. 자꾸만 약해지려는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노인 산티아고. 누구보다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고 즐거워하는 노인 산티아고. 거대한 성과를 일구어내고 기뻐하지만, 그 성과를 잃고도 크게 상심하지 않는 노인 산티아고. 그 모습은 작가 헤밍웨이의 만년의 정신적 지향에 다름 아니다.
헤밍웨이 만년의 정신적인 성취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런 정신적 성취의 끝이 왜 자살이었단 말인가? 사자를 꿈꾸고, 거대한 상어와 청새치와 한 판 승부를 벌이는 노인 산티아고의 모습은 헤밍웨이 바로 그 자신이었는데, 왜 노인 산티아고처럼 그렇게 살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글을 쓴다는 것!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현재를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나아가고 싶은 미래를 그리는 것일까? 적어도 헤밍웨이를 본다면, 나아가고 싶은 미래를 그리는 것이 글을 쓴다는 행위의 소이연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 속에서 자라난 나의 생각들이 나를 성숙시켜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과연 나는 그래서 성숙해지고 있는가? 글을 쓴다는 것이 한낱 말장난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헤밍웨이의 경건한 작품과 그의 안타까운 죽음 속에서, 어지러운 내 마음을 본다.
노인과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