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에게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오랫만에 써본 자작소설입니다.>
햇볕이 쨍쨍한 5월이다. 농부 김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논에 나왔다. 무럭무럭 자라는 벼를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았건만, 최근에는 그렇지 못했다. 얼마 전 이웃집 최씨와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최씨는 김씨를 찾아와 다짜고짜 욕을 퍼부었다.
“이봐! 김씨. 우리 논에 쓰다 남은 농약을 부었다지? 본 사람이 있어. 네놈 때문에 우리 논에 벼가 시들시들해져 버렸어.”
김씨는 당황했다. 아니 황당했다.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물었지만, 최씨는 가르쳐줄 수 없다고만 했다. 최씨의 논에 직접 가서 벼의 상태를 봤다. 조금 시들시들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쓰다 버린 농약이라는 것도 물에 다 씻겨버렸으니 확인할 길도 없었다. 남은 것은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뿐이었다.
“최씨가 화가 많이 났데. 오죽 했으면 그랬을까? 저 점잖은 사람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거 봤나? 김씨가 잘못했겠지…….”
“김씨, 저 사람 평소에 따지기 좋아하더니만, 잘 됐지 뭐. 저도 한 번 당해보라지.”
최씨는 평소 언행이 점잖았다. 나서지 않고 조용하고 부지런하게 제 농사만을 지었다. 간혹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푸근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반면 김씨는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적극 나섰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려다 보니 마을 사람들과 마찰도 간혹 있었다.
김씨는 이리 저리 억울함을 하소연 했지만, 김씨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둘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고 나서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 대부분은 그냥 최씨의 편이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에게 사실이 어떠한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최씨는 점잖은 사람이고, 김씨는 별난 사람이라는 것만이 유일한 사실이었다. 김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을 사람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밥맛도 없고, 살맛도 안 났다. 들판에 나가 고함을 질러 봐도 속은 계속 부글거렸다.
어제 저녁, 보다 못한 송노인이 김씨를 찾아와서 말을 해주었다.
“이보게 김씨. 마을 사람을 너무 원망치는 말게. 내 살아보니, 세상일에 사실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야. 이 일이 벌어지는 순간,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이미 정해져 있었네. 아니 이 다툼이 있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어.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내 쪽으로 기울게 하지 않으면 사실도 사실이 아니고 진실도 진실이 아니야. 그냥 묻혀버린단 말이지. 털고 일어나게. 이번 일로 마을 사람들이 밉겠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내게. 시간이 흐르고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내면, 그땐 자네가 용쓰지 않아도 자네의 억울함을 알아줄걸 세. 우리네 농부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어리석은 농부들아, 너희들이 다 잘못되었어.’라고 외쳐보게. 이웃들 모두가 싹 다 등을 돌릴걸세. 자기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 없네. 설사 그게 사실이라도,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맙다고 생각할 사람은 잘 없지. 안 그런가? 세상은 바뀌지 않네. 하지만 자네가 바뀌면 다른 세상이 되네. 흘려듣지 말게. 그럼 난 이맘 감세.”
김씨는 뜨거운 들판에 서서 어제 저녁 송노인이 해준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마을 사람들은 어제나 그제나 다름없이 허리를 숙이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김씨 논에서 벼는 쑥쑥자라고 있고, 멀리서 아내가 참을 이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