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갓난 아기를 어디에 써먹으리오?

빈배93 2012. 7. 9. 06:00

   지에 글 한 편을 완성하고, 그 글을 다시 읽는다. 어떨 때는 만족스럽고 어떤 때는실망스럽다. 한 시간 이상을 쓴 것을 구겨버리고 나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래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글감을 찾아 또 쓴다. 창작이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이제는 '창작'의 고통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이 인용했음을 밝힐 필요도 없는 글들이 많이 돌아다닌다.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 글을 재창작하는 것도 글쓰기 공부의 방법이 될 것 같다. 마침 창조 - 창작, 발명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 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서 재창작을 해봤다.       

 

   커먼 먹구름이 드리웠다.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한 청년이 연을 들고 문을 박차며 뛰쳐나갔다. 곧 하늘로 연이 날아올랐고, 땅에 선 청년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었다. 얼마 후 청년은 집으로 들어왔다. 죽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청년은 미친 것이 분명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했던가? 미치지 않고서는 경지에 오를 수 없는 법. 이 청년은 번개가 전기임을 증명하였고, 피뢰침을 발명하였다. 그가 바로 밴자민 프랭클린이다.

 

   느 날이었다. 프랭클린은 뭔가를 또 하나 발명하였다. 발명의 기쁨은 그를 친구 집으로 내달리게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발명품이 앞서고 프랭클린이 뒤따르는 것 같았다.

 

   프랭클린의 발명품을 본 친구가 뚱하게 말했다.

 

   “이게 뭐야? 대체 어디에다 써먹겠어?”

 

   프랭클린은 옆에 누워 있던 갓난 아이를 가리켰다.

 

   “자네, 이 아기 어디 쓸 데가 있는가?”

 

   선시대에 발명한 '활자'도 처음에는 무시당했다. '한글'은 무시를 넘어 박해를 당했다.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말보다 못하다는 조롱을 받았다. 원래 발명의 시작은 그랬다. 최초의 발명이 응용되고 활용되면서 만들어내는 그 엄청난 힘은 발명가 조차도 짐작하기 어렵다. 세종대왕이 한글이 한문을 제치고 전용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조제프 퀴뇨 역시 자동차 한 대가 말 500마리의 힘을 내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늘 이 글을 창작했다. 그런데 당장은 이 글을  도무지 쓸 데가 없다. 그러니 버려야 할까, 아니면 애초에 쓰지 말았어야 했을까? 창조의 시작은 그런 것이니 자책할 필요는 없다. 갓난 아이가 당장 쓸 데가 없다고 영원히 쓸 데가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 글 어디 쓸 데가 있는가?"라고 혹자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리라. "예. 쓸 데가 꼭 있을 거에요. 다만 아직 발효가 되지 않았을 뿐이에요. 발효가 되고 나면 어디에 쓰이게 될지 상상해보세요. 수업에, 강연회에, 저서에……. 저도 어디까지 일지는 모르겠지만, 파생효과는 무궁무진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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