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눈 속에서 소복을 입은 사람을 본 까닭은?
「뒤안에는 바람 소리」, 『아버지의 땅』, 임철우, 문학과 지성사, 2008.
임철우의 단편소설 「뒤안에는 바람 소리」는 전라도 어디쯤에 위치한 가상의 공간 낙일도落日島를 배경으로 한다. 18살 소년 형술의 아버지는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 인민군이 낙일도로 들어오자, 인민군을 등에 엎은 형술은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인민군이 급히 철수하자, 형술과 몇 명의 동료들은 낙일도에 남겨진다. 그들은 대나무 숲에 숨어서 탈출을 모의하는데, 형술이 절친했던 을석에게 배를 구해달라고 한다. 집에 돌아온 을석이 두려움에 떨며 잠이 들자, 을석의 어머니가 지서로 달려간다. 형술과 그의 동료들은 결국 모두 죽는다. 을석은 형술의 죽음에 오열하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달랜다.
“아까 너 잠든 틈에 몰래 지서에 갔다 왔었니라. 그저 무턱대고 빌엇다야, 인자 열여섯 살짜리 어린 것이 빨갱이가 뭔지 알기나 하것냐고, 그저 몹쓸 친구 하나 잘못 둔 죄밖에 없잖느냐고, 그런께 내가 대신 와서 빨갱이 숨은 자리를 신고해 드리는 거라고, 그렇게 싹싹 빌고 애원 했다야.”
형술이 죽고 3년이 지나도록 을석은 죄책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런 아들을 두고 어머니는 간곡히 달래고 또 달랜다.
“시상에 이놈의 땅덩어리가 생긴 뒤로 언제 어디서고 큰 난리는 항상 있었는 벱이니라. (…) 사람 목숨이 별스런 성싶어도 난리를 당하면 개 목숨 파리 목숨이나 매한가진 벱이여. 지아무리 귀한 목숨들 원통하게 죽어 없어져도 무심한 세월 지나면 몽땅 잊어불고 살게 되는 거이 이놈의 세상인심 법도여. 하기사 그게 옳은 소친지도 모르제. 안 그러것냐. 우선 산 사람이나 살고 봐야제. (…) 어서어서 정신 차리고 힘좀 내거라. 느그 홀에미 불쌍한 맘이라도 들면 말이다. 으응?”
을석은 그렇게 속이 시퍼렇게 멍든 어머니를 집에 두고, ‘눈 덮인 밭둑을 휘적휘적’ 걸어오르며, ‘흰 수의’를 입고 있는 형석의 환영을 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이데올로기[Ideologie]는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사상, 행동 따위를 이끄는 관념이나 신념의 체계’를 뜻한다. 그 시작은 숭고한 이상이었을지 몰라도, 종국에는 권력의 칼이 되어, 민중을 베고 넘어뜨려왔다. 오늘날 이 땅에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지금도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진보와 보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몇 권의 책을 뒤적여 봐도, 명확한 실체가 잡히지는 않는다. 혼자서 기껏 정리한 개념이, 진보는 무조건적으로 공평하게 나누자는 못 가진 자의 바람에 가깝고, 보수는 오로지 능력대로 나누자는 가진 자의 욕심에 가깝다는 것이다.
을석이 살았던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다를까? 어리석은 백성이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데올로기의 숙주가 되어 산다는 점. 그래서 광기와 폭력에 휩싸여 서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한다는 점. 두 지점에서는 하등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총칼이 말로 바뀌었고, 비교적 명확하던 피아의 구분이 불명확해졌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권력은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사람을 잡게 되었다.
흉년으로 기아가 닥쳐오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산 사람의 마음에 얼마간의 생채기는 남겠지만, 극복 못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념의 광기는 사람을 죽일 뿐만 아니라, 산 사람의 마음에 치유할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기니, 그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가? “원통하게 죽은 사람이라도 쉽게 잊히는 법이니, 산 사람이라도 정신 차리고 힘내서 살라”는 을석의 어머니의 말은 이데올로기의 광기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확인하게 할 뿐이다. 을석이 ‘눈 덮인 밭둑’을 걸으며 본 ‘흰 수의’는, 아무 색깔도 아무 이념도 없는,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삶에 대한 꿈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