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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안내서의 횡포를 넘어서

독서

by 빈배93 2013. 3.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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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책이던 인쇄물이던, 여행안내서는 친절하려고 한다. 여행 안내서를 읽은 이들은 여행안내서대로 여행을 하려고 애를 쓴다. 종종 여행안내서대로 할 수 없을 때가 닥쳐오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버리려고 온 여행이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여행이 되고 만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은 책에 대한 맹신으로부터 비롯된다. 여행안내서가 주는 은총 - 막연하고 깜깜했던 낯선 장소에 대한 한 줄기 빛으로서의 - 은 분명 무시할 것이 못 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고 했던가. 여행안내서가 가하는 압제 또한 만만치 않다. 아무리 좁은 장소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다 글로 표현해 낼 수 있겠는가? 아무리 친절한 여행안내서라고 하더라도 특정 장소의 아주 일부분만을 간략히 보여줄 뿐이다. 여행안내서의 필자는 특정 장소에서 유심히 봐야 할 것과 그냥 스쳐지나 갈 것을 자의적으로 - 어떤 경우에는 관습대로 - 정해버린다. 그것이 깊은 고뇌 뒤의 선택이라 할지라도 자의적임에는 변함이 없다. 내게 인상 깊은 풍경 혹은 대상을 여행안내서의 필자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안내서에 부여된 권위는 역으로 어떤 풍경 혹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 이러저러해야 함을 강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강하게. 그러다 보면, 원고지 칸처럼 짜인 일상을 벗어나고자 시작한 여행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어느새 우리는 여행안내서가 짜놓은 매트릭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여행안내서는, 필자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것을 손에 들고 여행하는 이에게 이미 막대한 횡포를 부린 셈이다.

 

   여행안내서에 충실한 여행은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여행이 되기 십상이다. 점과 점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은 이동하는 차 속에서 망각된다. 평생을 땅바닥에 붙어살아야 하는 숙명을 지닌 인간이, 새나 물고기처럼 3차원을 다니지는 못할지언정, 점이라는 0차원 공간에 스스로를 묶어두어서야 되겠는가? 그것도 굳게 마음먹고 나선 여행길을. 1차원의 선을 넘어서 2차원의 면으로의 여행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행 안내서를 읽을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여행안내서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여행안내서의 역할을 거기까지. 길을 나서면, 득어망전得魚忘筌의 고사처럼 여행안내서는 서재에 놓아두고, 우연의 세계에 몸을 맡기자. 점과 점을 연결해주는 승용차도 아파트 주차장에 고이 모셔두자. 건강한 인간의 두 다리로 선을 만들고 그 선들이 모여서 면이 되게 하는 데에 진정한 여행의 기쁨이 숨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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