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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정암사 가는 길

잡담

by 빈배93 2015. 2. 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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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사 수마노탑(2014.01.12.)

 

정암사 가는 길

 

  남쪽의 눈은 맥 없이 가냘파 쉽게 녹고 북쪽의 눈은 끈덕지게 쎄서 요지부동이다. 사람들은 맥 없이 가냘픈 것을 아름답다 하고 끈덕지게 쎈 것을 독하다 한다. 고한 시장에서 정암사 가는 길가의 눈은 흴래야 흴 수도 없었고 녹을래야 녹을 수도 없었다. 원망도 슬픔도 없었다. 순수는 어느 시절의 영광이었던가. 유기된 눈은 넝마처럼 널부러져 사람 걸을 길을 지워버렸고 나그네 발걸음은 차도로 내려앉았다. 부처님 뵈러 가는 것이 열에 아홉은 정성인데 사지 육신 멀쩡하면서 동테 달린 것에 얹혀가서야 되겠나 했다. 십리 길 한 발 한 발 합장이어야 했다. 검은 눈 길 앞에서 그러한 당위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날은 저물고 바람은 찼다. 사람 다닐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길 없는 길 위에서 정암사는 멀었다. 불순(不純)하고 불온(不穩)하고 불안(不安)하던 길을 걸어 산문에 닫자 불[不]이란 불은 모두 업장처럼 소멸하였다. 대웅전 앞뜰은 정갈하였다. 뒷뜰의 열목어는 빙하에 잠이 들었고 부처님 사리 품은 수마노탑 너머로 노을이 붉었다. 넉넉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기도하고 길 없는 길을 돌아나왔다. 날은 어둡고 바람은 더욱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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