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나루터는 대개가 교통의 요충지였다. 사람이 모이면 재화가 모이고, 그 재화가 다시 사람을 부르는 것은 당연지사. 사람가 재화가 북적이던 구포면은 500년 이상을 양산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양산군은 지형적으로 낙동강을 따라서 9개의 면들이 이어져 있었다. 동래부는 만덕고개를 넘어야만 다다를 수 있었는데, 예전 행정구역이 물길과 산맥을 따라 나누어진 점을 감안하면 구포면이 양산군에 속한 것은 당연지사. 구포면은 경상도의 수많은 나루터 중에서도 으뜸가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 영남 최대의 조세 창고인 감동창甘同倉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류와 상업이 번창하여 "경상도의 돈은 모두 구포로 모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종 4품의 군수가 다스리던 양산군에는 총 9개의 면이 있었는데, 구포면이 양산군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1만호를 거느리고 있었고, 세금 수입이 나머지 8개 면의 100배에 달하였다.(상소문에 실린 내용인데, 어느 정도의 과장은 있겠으나, 구포면이 양산군을 먹여 살린 것은 분명하다.)
그런 구포였으니 재정이 좋지 않았던 인근의 동래부가 얼마나 탐이 났었겠는가? 구포면에서 떨어질 떡고물이 얼마나 먹고 싶었겠는가? 과정은 알 수 없으나(아마 높으신 분들끼리의 사바사바가 있었을 것이다.), 1869년(고종 6년) 왕명으로 구포면은 동래부로 넘어간다. 생각해보라. 엄청나게 많은 세금을 내던 분당구가 서울시로 넘어간다면, 성남시가 가만히 있겠는가? 하지만 동래 부사는 정3품의 당상관이고 양산군수는 종4품의 당하관이다. 평생 양산군수를 해먹을 것도 아니고, 상관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지사. 수차례 올라온 양산군민의 상소에 "너희들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 따위의 답이나 하고 있었다. 양산군수에게, 경상도 관찰사에게, 의정부에 올린 12차례의 상소에 답변은 번번히 똑같다. "너희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원칙대로 처리할 테니 기다려라." 그래서 양산군을 대표하여 유생 3명이 임금을 만나러 천릿길을 떠난다. 사림이었던 우석규·서상로·이기수가 그들이다. 우석규가 가장 연장자였는데 서울로 떠나던 1874년에 57세였다. 당시로는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노인이었음에도 그 먼 여정을 떠난다. 서울에 도착했으나 시골 유생이 임금을 만날 길은 없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사고를 치기로 결심한다. 목멱산(남산)에 올라 봉수대에 무단으로 봉화를 올리고, 의도한 대로 의금부에 투옥된다. 신문 과정에서 "죽어도 좋으나 우리 군의 억울함을 해결해달라고 요구한다." 이런 사정을 들은 영의정 이유원은, 의기가 가상하다, 봉화사건은 면책하라, 구포면은 다시 양산군으로 환속하라, 고 했다.(고종 때도 이런 멋진 영의정이 있었단 말인가? 분명희 동래부사하고 얼굴을 붉힐 것을 각오해야 했을 것인데.)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세 선비는 영웅이 되었다. 그로부터 40년이 못 되어 구포면은 영원히 양산군을 떠나 부산에 귀속된다.(세 선비는 그 꼴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니 불행 중 다행이다.)
구포면을 돌려받은 이듬해인 1875년에 오늘날 내원사 입구에 구포복설비 3기가 건립된다. 하나는 영의정 이유원의 것, 다른 하나는 당시 양산 군수의 것, 나머지 하나는 비석 건립 당시의 군수의 것이었다. 우석규·서상로·이기수는 벼슬이 없으면 비석을 세울 수 없다는 당시 관례 때문에 이유원의 비석 뒤에 이름을 병기하였다.(고생은 이놈이 하고 떡은 저놈이 쳐먹는 다더니만.) 이 비석은 오늘날 양산향교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박물관에서 본 자료에 나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다녀와서 보니 내가 간 날이 특별 전시회의 마지막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