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배신
어머님이 베틀로 옷감을 짜고, 그 옷감을 한 땀 한 땀 기워서 옷을 만들어 주셨다. 짧아야 10일. 옷가게에 가서 내 몸에 맞는 기성복을 입고 나온다. 길어야 1시간. 가마솥에 밥을 짓고 뜸이 들기를 기다려서, 그 밥을 푸고 차려서 먹었다. 짧아야 1시간. 끓는 물을 컵라면 용기에 붓고 익으면 먹는다. 길어야 3분. 물을 끓여서 찻잔에 붓고 차가 우려나기를 기다려 마셨다. 짧아야 15분. 100원 짜리 동전을 넣고 버튼을 꾹 눌러서 커피를 마신다. 길어야 10초. 이역만리 먼 길을 떠나와 부모님의 안부가 궁금해서 편지를 하고 답장을 받았다. 짧아야 6달. 미국 유학 와서 어머니가 보고 싶어, 전화기 버튼을 꾹 눌러 영상통화를 한다. 길어야 30초.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현재의 내 모습을 올린다. 실시간.
오늘날 세상은 인간이 자각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시간까지 점령했다. 더 이상 빨라져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영역만이 남아 있다. 더 이상 빨라질 수 없다면, 남은 것은 그 상태를 유지하거나, 다시 느려지는 것밖에. 문학 사조의 시작은 전 사조에 대한 반발로부터 비롯된다. 유행도 오래면 심리적으로 지치게 되어, 결국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빨리, 빨리”에 대한 강박에 이제 지칠만할 때도 되었다. 그에 대한 반발은 뭘까? 천천히! 느림!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걷기 예찬’, ‘슬로우 푸드 예찬’, ‘DIY 열풍’으로 대변되는 ‘느린 삶’이 2013년 대한민국에서 ‘빨리 빨리’의 후사조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도 빠르게 지나쳐갈 한 때의 유행일 수도 있겠다 싶다.
비극은 언제나 조급함으로 인한 시간의 부족으로부터 발생한다. 저 유명한 로미오가 잠시 눈을 감고 있는 줄리엣을 앞에 두고, 담배만 한 대 태웠다면, 비극은 없었다. 언덕 위에 서서 망부석이 된 어머니가 10초만 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면, 비극은 없었다. 조급하고, 빠른 것은 언제나 위태롭다. 한 템포 천천히 가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시간이 돈’이라는 일부만 진실인 이야기가, 전체가 진실인양 행세하며 오늘날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시간이 돈’임을 맹신하고,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100km/h에서 110km/h로 올렸더니 사망률이 10%가 넘게 올라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비판 여론에 대해, 그로 인해 얻은 시간이 몇 십만 시간이 된다고 변호한다.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2013년의 대한민국 역시, 돈을 더 벌려면, 더 잘 살려면, 그래서 더 행복하려면, 빨리 빨리 움직이라고 우리를 독촉한다. 살기 위해서 기꺼이 죽으라고 독촉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즉필생思則必生의 이순신이 아닌데도 말이다. 2013년의 대한민국에서 ‘느린 삶’은 여전히 패배자의 그것이거나, 희망하지만 다가가기는 어려운 이상이다.
신속한 결정과 순간적인 번뜩임의 미덕을 찬양하며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 속에서, ‘느린 삶’을 예찬하는 책들은 우리에게 위로를 선사한다. 그러나 사례와 연구로 무장한 자기계발서에 대항한 ‘느린 삶’을 예찬하는 책에는 사례와 연구가 없어, 그 비판의 축이 엇나간 형국이다. 『속도의 배신』의 저자 프랭크 파트노이가 사례와 연구를 들고서 ‘느린 삶’을 수호하러 나섰다.
그래 한 번 붙어보자. 나도 사례와 연구를 갖고, 우리가 왜 최대한 기다려야 하는지 말해주마. 빠른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느린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사례와 연구를 갖고 붙어보자 말이다. 내 결론부터 말해주마. “일단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파악하고 난 다음에는 최대한 오래,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다. 기다려라!” 왜 그런지 궁금하면 읽어봐라! <프랭크 파트노이 지음, 강수희 옮김,『속도의 배신』, 추수밭, 2013. 정가 15,000원.>
<이 리뷰는 도서출판 청림으로부터 책을 증정 받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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