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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김희재)

독서

by 빈배93 2024. 1. 3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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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크》는 작가의 처녀작이자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심사위원 만장일치)이다. 김희재는 영화를 전공했고 음악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혼 당한 시나리오 작가 도선, 커밍아웃한 둡둡과 그의 애인 양우, 둡둡의 아버지 강규산, 탱크의 운영자 황영경과 그의 이부동생 손부경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와 장영희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떠올랐다.  

 

○ 도선도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에 돌아온 이후 쉰 적이 없었다. 집을 구하고 학원 일을 알아보는 사이 숨 돌릴 새도 없이 시간이 갔다. 그 와중에도 글을 썼다. 자신이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매일 새벽, 도선은 일을 나가기 전에 책상에 앉았고 뭐라도 써보려고 텅 빈 화면을 견뎠다. 퇴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졸음을 쫓아내며 버티고 쓰고 지우고 다시 썼다.(139)

 

○ 이제 양우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둡둡의 죽음이, 이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 고통은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다시 밖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사람들과 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오래 기다리고 잠을 많이 자도 양우가 기다리는 것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175)

 

● 강규산은 다이어리를 펴서 지금 그가 어느 때에 있는지를 가늠해보았다. 그는 협탁 안에서 볼펜을 꺼내 날짜를 적었고 동그라미를 쳤다. 강규산은 한참 동안 볼펜을 들고 있다가 디지털 시계에 적힌 시간을 모서리에 적었다. 그리고 기상시간을 적었다. 일어나서 무엇을 했는지 적었고 티브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적었다. 아내가 몇 시에 일어났는지 적었고 자신이 커피를 가지고 안방에 다시 들어왔다는 사실을 적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를 적었다. 그리고 남은 하루를, 남은 낮과 밤을 어떻게 버틸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야만 하는지 적었다. 한 페이지가 금방 넘어갔다. 일과만을 쓰려 했는데 과거가 계속 범람하는 바람에 펜을 놓을 수가 없었다. 쓰는 동안, 강규산은 전에 없이 마음이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감각의 한 부분이 되살아나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었던 공허의 어떤 부분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강규산은 손에 쥐가 날 때까지 계속 썼다. 밖에서 조그맣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펜을 멈출 수가 없었고 계속 쓰는 사이 바깥은 다시 조용해졌다.(201)

 

● 늘 그랬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쓴다.(204)

 

○ 양우는 탱크의 번성이 예전처럼 신경 쓰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우연히 탱크를 믿는 사람을 만난다면 꼭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닥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생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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