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매일이 늘 다르지만, 늘 같은 날입니다. 365일이 월화수목금토일의 하루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무료할까요? 한 때, 기념일을 무의미하고 귀찮게만 여겼습니다. 그 때는 하루하루가 너무도 새롭고 재미있었을까요? 아주 일부분 그렇기도 했지만, 큰 자극에만 반응하는 무신경 탓이었습니다. 기념일은 새하얀 일상에 특별한 색을 칠하는 날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새하얀 일상에 아름다운 색을 칠하는 것은 기쁜 일이 되었습니다. 지난 12월 3일은 다섯 번째로 맞는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출근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갑자기 드르륵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음.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간단히 답장을 썼습니다. “안다.” 누가 경상도 남자 아니랄까봐.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야 궁합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퇴근 길에 아내와의 추억이 서린 장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부산시 기장군 일광읍 이천리 132-15 번지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마레’입니다. 연애 시절에 집사람을 따라 왔던 곳입니다. 당시에는 마음 속으로 투덜대었습니다. ‘밥 한 그릇 먹는데, 뭐 이렇게 멀리까지 오는 거야?’ 그 뒤로도 아내는 가끔씩 ‘마레’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먼저 가자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내와 오랫 동안 찾은 곳입니다.
마레는 바닷가 절벽의 바로 위에 있습니다. 통나무에 통유리로 지어졌습니다. 참 예쁜 건물입니다. 바로 아래가 바다입니다. 바다 위에서 식사를 하는 듯 합니다. 새하얀 건물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그간 보아온 여느 바다와는 또 다릅니다. 식사를 하다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이, 새하얀 밀가루를 풀어놓은 듯 하였습니다. 점성마저 느껴졌습니다. 자꾸만 창밖을 보는 내게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봅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그 포말을 멍하니 지켜만 보았을 따름입니다.
‘마레’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의 영화배우 ‘마레’입니다. 장 콕토라는 감독을 만나 대성한 배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독일의 화가(1837~1887) 마레입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로 단순한 화면 구성과 암색 계통을 즐겨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마레’라는 상호는 후자의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설사 아니라고 해도, 이 곳의 풍경과 그의 화풍은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동해안의 단순한 해안과 암색의 갯바위를 쳐대는 검푸른 바다는 그의 화풍과 너무도 흡사할 것 같습니다.
음식은 먹을 만합니다. 음식도 서비스도 어느 것 하나 불편함이 없습니다. 오기에 조금 불편하다는 것도, 그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흠이 되질 않습니다. 마레에 가서 새하얀 도화지에 짙푸른색과 암색을 칠하고 왔습니다. 차분하고 무거운 색으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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