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강제 이주된 실향 유물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
망미루望美樓는 동래구 온천 1동 209번지에 서있는 동헌의 문루이다.
1742(영조 18)년에 세워졌으니 300년 가까이 보존되어온 문화재이다.
우리의 문화재 중 제 위치를 잃은 것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마는,
망미루 역시 제 위치를 잃은 채, 그냥 아무렇게나 놓여진 실향민의 처지이다.
망미루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일제시대 시가지 정리계획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 덩그러니 세워졌다.
원래 동래부 청사가 있던 곳에는 고층 건물이 빽빽히 들어차 다시 갈 수도 없다.
주변에는 동래파전·산성막걸리를 파는 가게만이 빽빽히 들어차,
동래 어디쯤에 있었겠다는 추측만 확인시켜주고 있을 따름이다.
망미루가 본래 자리에 있었던 옛 사진이라도 남아 그 본모습 확인할 수 있음은 차라리 다행이다.
# 2 미인을 그리워하는 누대樓臺
망미루 후면의 현판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망미望美'란 '미인을 그리워 하다'로 풀이된다.
송강의 「사미인곡」에서 확인할 수 있듯, 미인은 다름 아닌 임금이다.
옛날 한양으로부터 부임해온 동래부사가 임금을 그리워해 붙였다고 한다.
그 동래부사는 임금이 그리웠던 것일까? 한양이 그리웠던 것일까?
오늘날 나의 천박한 정서로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내 서예를 잘모르나 큼직하고 자신있게 갈겨쓴 필체가 싫지는 않다.
# 3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동래
망미루 전면에는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도호부都護'는 변방에 설치되었던 행정기관이고, '아문衙門'은 관청을 뜻하는 말이다.
군사요충지로서의 동래의 위상을 확인케 해주는 편액이다.
망미루 아래에서 동래지방의 3.1 독립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 4 사라지고 줄어든 것들
누대 위에는 시간을 알리는 큰 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높은 주초석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 주초석도 짧아져서 원형과 달라졌다.
그 옛날 망미루를 지나면 관아에 이르렀지만,
이제는 망미루를 지나 아무리 가도 관아는 없다.
그저 멀찌감치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금강공원'만 덩그라니 놓여있을 뿐.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망미루는 그냥 우두커니 서있다.
# 5 본 게 있어야 전형적이라는 말이 이해된다
팔작지붕, 2층 누각, 계자난간, 이익공.
알아보면 모를 것도 없지만, 그 모든 것이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수법이었음만 떠올려본다.
그런데 본게 있어야 전형적이라는 말이 이해가 될 것인데, 모르겠다.
공부해야겠지만, 늘 귀차니즘으로 인해 미루게만 된다.
잘 모르는 내 눈에 특이했던 것은 저 휘어진 대들보의 모습이었고,
감탄한 것은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도 견고하게 지어낸 선조들의 기술이었으며.
슬펐던 것은 그 옆으로 이어졌던 담과 그 안으로 보이던 관아의 부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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