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박노자·허동현, 푸른역사, 2009.
두 사람이 싸운다. A는 자기가 옳다고 한다. B도 자기가 옳다고 한다. 누가 옳을까? 세상에는 100% 맞는 말도, 100% 틀린 말도 없다. A의 말과 B의 말이 다만 ‘몇 %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느냐’는 문제일 뿐이다. ‘내가 옳으니 네가 그릇되다’는 생각은 유아기적 발상이다. ‘내가 옳으니 내 말을 따르고, 네 말을 폐기하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진실은 우위를 가릴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어울어져 함께 가야 할 것이다.
세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흑백논리의 위험성은 충분히 이야기되었으나, 언제나 자신의 논리는 흑백이 아니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논리는 흑백이라 몰아붙인다. 그래서 승리를 쟁취하고, ‘나는 강력하고, 나는 관대하다’며 씨익 웃는다. 정치판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 전 분야에 걸친 이야기이다. 볼테르가 말했던가? ‘나와 다른 생각이 부딪힐 때, 진리의 불꽃이 일어난다’는 말. 그 말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간절하다.
가끔 국어가 싫다는 학생을 만난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수학처럼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어서 싫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100%의 진실이란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100%의 진실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갑갑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박노자와 허동현이 함께 쓴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를 읽었다. 박노자가 허동현에게 먼저 편지를 쓰고, 허동현이 답장하는 형식이다. 근현대사 100년의 쟁점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 주고 받았다. 일단 책을 출판한 동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책의 서문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는 독자가 이념적으로 상반되는 두 사학도의 “역사에 대한 의견”을 읽고 저자들 사이의 논쟁을 통해 쟁점을 보다 확실히 이해함으로써 자신만의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쓰인 다원적, 총체적 역사 쓰기의 한 시도다. 이 책을 시작하면 세운 전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논쟁을 벌이는 사학도 두 사람 모두가 “절대적 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겠다는 의지의 수립이었다. 둘 다 역사 쓰기가 어차피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 합의하여 논쟁 과정에서 서로의 주관을 비교함으로써 독자에게 “개인적 의향에 의거한 선택”의 권리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지식인과 친일’을, 2부에서는 ‘여성’을, 3부에서는 ‘대중문화’를, 4부에서는 ‘종교’를, 5부에서는 ‘한국 근대 100년’이라는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甲論乙駁 한다.
아무래도 갑甲인 박노자가 조금 불리한 듯하다. 허동현이 항상 을乙의 위치에서 논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누가 물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두 사람의 논박을 통해 얼마만큼 진리라는 데 다가갈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지요.” 그래도 승부가 궁금하면 “마징가와 태권브이 둘이 시합을 붙여서 결과를 알려주시면, 제가 답할 게요.”
박노자의 책은 몇 권 쯤 읽어봤다. 마르크스 이론에 상당히 충실한 사람이라 알고 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중과 계급을 일관된 잣대로 제시하며, 어떨 때는 치고 어떨 때는 빠진다. 허동현은 처음 알게 된 사람이다. 국내 모 대학 교수인데, 이념적으로 말하자면, 그 흔한 중도보수 쯤 되려나.
개인적으로는 박노자의 ‘민중과 계급의 논리’가 상당히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으면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논리가 현실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허동현의 경우는 가급적 현실을 안배하려는 생각이 엿보였으나, 철학이라고 할 만한 뚜렷한 뭔가는 발견할 수 없었다.(물론 박노자도 허동현도, 독자로서 내 능력이 모자란 탓에 잘못 파악한 것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감상과 평가이다.)
옛날부터 해온 생각이 있다. 이 책을 읽고 그 생각은 더 강화되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념의 핵심은 인간의 행복한 삶이다. 그것이 좌니 우니 중도니 하며 방식을 달리 했을 뿐이다. 좌니 우니 하는 이념은 중요하다. 그런데 좌가 우를, 우가 좌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위험하다. 좌가 사라진 우의 세상, 우가 사라진 좌의 세상. 그 세상은 독재가 판을 치는 세상이요, 지옥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행동하며,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세상이 비록 지옥이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소수의 사람을 내가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멀었다.
재차 반복하자. 우리는 ‘인간의 행복한 삶’이라는 핵심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라는 말 대신 ‘나’를 넣어서는 안 된다. 불가피의 이름을 빌어 ‘인간의 행복한 삶’이라는 핵심을 잠시라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잠시’ 때문에 불행해진 인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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