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 이 이상 자본주의를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소비가 있어야만 자본주의는 굴러간다. 소비를 위해서 기업은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빠른 사이클로 쓰고 버려야 자본주의가 말하는 발전이 있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을 무지막지하게 착취해야만 한다. 자본주의는 자연으로부터 착취한 것을 생산이라고 정의한다. 착취와 생산이 언제부터 동의어가 된 것인가? 그 충족된 욕망의 끝에 쓰레기가 남는다. 땅에, 공기에, 바다에, 넘쳐나는 쓰레기들! 쓰레기는 자본주의 발전의 상징이다.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서 살아가는 모습. 멀지 않은 미래의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런지? 아니라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고 싶다. 1초 뒤에 터질 시한 폭탄을 들고서, "봐라! 지금 아무 문제도 없지 않으냐?"고 항변하는 사람처럼.
집사람이 휴대폰을 바꿨다. 휴대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밧데리 때문이었다. 통신사의 알량한 수법이야 어찌 되었건, 밧데리를 새로 사는 것보다 휴대폰 새로 하는 것이, 더 싸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네 서민의 현실적 감정이니……. 그렇게 또 하나의 멀쩡한 쓰레기가 생겨났다. 자본주의는 휴대폰 하나만큼 발전했다.
데이비드 스즈키가 말하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이제는 멈춰서야 한다. 지구는 버텨낼 기력을 거의 상실했다. 그 징후는 곳곳에서 무차별적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는 애써 못본 척 하고 보고도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현상으로 치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장밋빛 청사진을 계속 그릴 수 있으니…….
지구 종말은…… 유성도, 지진도, 핵전쟁도 아닌, 쓰레기로 인해 찾아올지도…….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을 읽었다. 난지도 쓰레기 속에 내몰린 인간 군상을 다룬 소설이다. 그들은 쓰레기로 먹고 살고, 쓰레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문명의 찌꺼기 속으로 내몰린 인간 찌꺼기들의 형상. 끔찍한 지옥의 모습, 그것이었다. 황석영은 그 풍경을 '세계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낯익은 세상'이라고 했다.그 지옥이 이미 우리 가까이 와있는 현세태였단 말인가?
이어서 데이비드 스즈키의 『마지막 강의』를 읽었다. 지구 종말을 막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자연의 일부분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삐풀린 인간의 욕망을 잡아매는 것임을 읽었다. 그 욕망을 잡아매는 것이 쓰레기를 줄이는 것임을 연이어 생각했다.
저 황석영 소설 속의 쓰레기를 재활용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쓰레기를 줄이는데 일조한, 인류의 구원자였다. 난지도 쓰레기장에 서식하는, 인간 찌꺼기이자 인류의 구원자! 나는 데이비드 스즈키의 눈으로 황석영 소설의 군상들을 그렇게 바라본다. 더 이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는 실정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더 이상 지구종말을 막을 대안이 없는 실정이라는 말로 자꾸만 들린다.
낯익은 세상
마지막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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