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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서정주,「견우의 노래」

국어

by 빈배93 2014. 12. 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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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의 노래

서정주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그들이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는 아이들도 많더라. 아무튼 '견우와 직녀'는 국민 설화(說話)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야기야. 그걸 소재로 시인 서정주는 시를 썼어. 모두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소재로 선점한 거지. 서정주의 친일 행적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재미있는 시를 써서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니,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그 죄를 감해주면 어떨까. 어쨌든 '견우와 직녀'를 요리한 그의 솜씨를 한 번 보자구.

 

  제목이 '견우의 노래'네. 시를 읽어봐야 아는 거겠지만, 화자는 '견우'겠구나 하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시를 읽을 때는 특히나 제목을 유심히 살펴봐야해. 제목이 없거나, 제목을 모르고 시를 읽으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무지하게 많단 말이지. 암튼, 1연은 이렇게 시작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우리는 누굴까? 당연히 '견우와 직녀'겠지. 그런데 말이 이상해. 사랑을 위해서 이별이 있어야 한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인데 말이야.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백수(白手)에게는 휴식이 노동이지. 그러니 백수에게 휴식은 달콤한 것이  못 돼. 힘겹게 노동한 사람이라야 휴식의 달콤함을 안 단 말이지. 다시 말해, '달콤한 휴식을 위하여서는 노동이, 노동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휴식도 사람이 하는 거고 사랑도 사람이 하는 것이니 뭐 크게 다를 게 있겠어.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을 두고 역설적으로 표현했다고 하지. 역설(逆說), 영어로는 '패러독스'. 유행가 가사에서 '이별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지만, 이 시에서는 이별을 참사랑을 위해 참아내야만 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 그러니까 '이별은 더 큰 사랑을 위한 거름' 정도로 말하고 있다는 거지. 그러면 2연으로 넘어가 볼까.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 갔다 오는 바람이 있어야 하네.

 

   '물살'이라는 시어가 눈에 띄네. '물살'은 좋은 의미일까? 안 좋은 의미일까? 물살이라는 시어가 어떻게 나왔을까? 은하수(銀河水)가 떠오르지 않니? 그랬다면 빙고! 물론 은하수는 하늘에 허벌나게 떠 있는 별들, 그러니까 은하를 강물에 비유한 말이야.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서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고. 그래서 '물살'이 나온 거야. 당연히 그 의미는 부정적일 수 밖에. '물살'은 만남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야. 그럼 '바람'은? 얘가 하는 일이 뭐지 물살을 몰아갔다 몰아 온다고 했잖아? 잔잔해도 건너기 어려운데 물살을 사납게 만드는 놈이니, 이 놈 역시 견우와 직녀에게는 나쁜 놈일 수 밖에. 그러니 '바람' 역시 고통과 시련을 주는 존재로 확정!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물살'과 '바람'이 있어야 한다는 걸까? 1연을 봐! 답이 딱 나오지? '우리들의 사랑을 위해서'지. 그러니까 2연은 1연에 대한 부연이자 변주야. 그런데 부연이 뭐냐고? 변주가 뭐냐고? 아 모르면 사전 찾아봐야지. 귀찮다고? 그럼 내가 찾아준다.『표준국어대사전』에 이렇게 되어 있네. '부연(敷衍) :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덧붙여 자세히 말함.' 부(敷)는 '펼치다'는 뜻이고 연(衍)은 '넉넉하다'는 뜻이니, 넉넉하게 더 말하는 게 '부연'이란 말이지. 그 다음 변주.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 '변주 :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ㆍ리듬ㆍ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함.' 설명이 더 어렵지? 쉽게 말하자면 살짝 변화를 준다는 거야. 왜 그랬을까? 같은 말을 그대로 반복하면 읽는 사람 입장에서 지루하잖아. 쓴 사람은 무식해 보일 수 있고. 그래서 그런 거야. 3연으로 넘어가자.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뭣이 방금 전에 본 1연과 비슷하지 않아? 도식화 하자면 'A를 위하여서는 B가 있어야 하네.'라는 형식이 반복되고 있잖아. 이런 걸 어려운 말로 '유사한 통사구조의 반복'이라고 해. 시에서 흔히 쓰는 수법이지. 왜 이런 수법을 쓸까? 반복은 언제나 운율과 강조에 연결되지. 그걸 노린 거야. 1연의 '사랑'의 자리에 '그리움'이 있네. 사랑해야 그립지 않겠어. 안 사랑 하는데 그리울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러니까 그리움은 사랑의 다른 모습이지. '이별'의 자리에는 뭐가 있지? '푸른 은핫물'이 있네. 푸른 은핫물은 무슨 의미일까? 견우와 직녀를 갈라놓는 놈이지. 그러니까 이별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춘 것이 '푸른 은핫물'이란 말이지. 4연으로 가자.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견우가 갈 수 없는 곳이 어딜까? 당연히 직녀가 있는 곳이지. 왜 갈 수 없을까? 은하수가 가로막고 있으니까. 돌아갈 수도 없어. 왜? 은하수는 무지무지 기니까. 거길 돌아가느니 그냥 1년 기다리는 게 나을 거야. 견우는 '오롯이' 서 있는 '이 자리'는 어딘지 말 안해도 알겠지? 그런데 그 자리에서 견우는 '불타는 홀몸만'으로 있어야 된데. 무슨 소리야? 분신 자살이라도 해야된다는 거야? 아니겠지. 이런 표현을 들어본 적 있지. '눈빛이 이글거린다.', '사랑이 식었다.' 그래 그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눈에서 불이 일어나지, 그 불은 당연히 마음에서 비롯된 거고. 사랑이 식은 것은 사랑의 불이 꺼졌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불타는 홀몸'은 직녀를 너무너무 그리워하는 혹은 너무너무 사랑하는 견우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라고 봐야겠지.  이제 반 왔어. 5연으로 넘어가 볼까.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화자, 그러니까 견우가 직녀를 불렀네. 무슨 할 말이 있어서겠지.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직녀는 대답이 없어. 그러니까 이 시는 대화체는 아니야.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는데 그게 어떻게 대화일 수 있겠어. 그래서 모의고사나 수능에서 이럴 때 '말을 건네는 어투', '말을 건네는 방식'이라는 표현으로 한 발 물러선단 말이지. '말을 건네는 어투',나 '말을 건네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독백체에 속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구. 

  아무튼 견우는 '모래밭에'서 '풀싹'을 세겠데. 견우의 직업이 뭐였지. 그래 소 풀먹이는 목동. 그러니까 직녀가 그리워서 폐인처럼 지내지는 않겠다는 거지. 다시 말해 제 할 일은 하겠다는 거지. 어쩌면 직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옥황상제가 신경쓰여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 '장인 어른이 우리 결혼하고 일을 안한다고 생이별을 시켜놓았으니, 그래도 일 안하면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것도 못 만나게 하면 어쩌지'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런데 왜 하필 '모래밭'일까? '모래밭'에는 풀이 잘 자랄 수 없잖아. 목동 입장에서는 참 곤란한 곳이지. 그러니까 굳이 '모래밭'이라는 시어를 등장시킨 것은 견우가 현재 처한 공간이 시련의 공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야. 6연으로 넘어 가자.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그대는 누구? 당연히 직녀지. 직녀가 하는 일은 뭐였더라. 그래 베 짜는 거. 그런데 직녀가 '구름 속에서' 베를 짜야 되네. '구름 속'은 대체 무슨 의미지? 고전문학에서 흔히 구름이 간신배를 비유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왜? 임금으로 상징되는 해를 가리니까. 그럼 직녀에게 '구름 속'은? 아, 구름이 자욱하게 끼면 어쩌면 보일 수도 있는 견우의 모습을 확실히 안 보이게 되잖아. 그러니까. '구름 속'이라는 말은 직녀가 처한 시련의 공간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견우는 참 현명해. 몸을 자꾸 놀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면, 좀 덜 고통스러운 것을 알았단 말이지. 군대에서도 자꾸 일을 시키는 이유가 딴 생각 못하게 헛짓거리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잖아. 7연으로 넘어 가자.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아! 칠월 칠석. 그날이 되면 눈썹 같이 생긴 반달이 하늘 가운데에 걸리게 될 것이고, 까마귀와 까치가 날아와서 다리를 만들어 주겠지. 그런데 '눈썹' 하니까 떠오르는 것 없어? 반달의 모습을 비유한 거 아니냐고? 그래 맞아. 그런데 그거 말고 하나 더? 직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 이해가 안 된다고? 그래 이해한다. 잘 들어. 미인의 눈썹을 가리는 말이 있어. 아미(蛾眉)라고. 누애 나방 같이 가늘고 깊게 굽어진 눈썹이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눈썹 같은 반달'이라는 시구가 직녀를 떠오르게 한단 말이지. 아련한 그리움을 떠오르게 한단 말이야. 마지막 8연이야.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6연과 연결해서 이야기해 볼까. 이렇게 되겠지. '소 키우기 힘든 모래밭이지만 우짜든동 나는 검은 암소에게 풀을 먹이고, 구름이 서로를 보지 못하게 가리지만 너는 비단을 짜라.' 닥치고 일하자. 뭐 그쯤 되겠지. 이제 다 봤어. 시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성숙한 사랑을 위해서는 이별의 슬픔·고통을 기꺼이 참아내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이 할 일을 여전히 충실히 해야 한다.' 뭐 그런 거겠지. 암튼 나는 견우와 직녀를 때어 놓은 옥황상제가 마음에 안들어. 옥황상제가 꼭 노동만이 인간의 구세주인양 선전하는, 그러면서 저희끼리만 다 가져가는, 신자유주의의 대변자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노동은 신성한 것이야, 하지만 휴식도 그만큼 신성한 것이지. 신혼에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일 좀 덜했기로서니,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무슨 정리해고를 밥 먹듯이 하는 악덕 사주도 아니고. 저들에게 저들 하고싶은 대로의 부부 생활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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