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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이윤기)

단편소설

by 빈배93 2024. 2. 4.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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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때문에 히라노와 강제로 헤어진 남이, 옛 상관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해 남이와 결혼한 백묵. 세월이 흘러 남이는 히라노와 재회하는데. 시간이 마법이었던가. 제발로 돌아온 남이의 이야기. 

 

○ 백묵(하대령의 부관)은 남이 서방의 별명이다. 이름이 이백목인데, 교사 노릇을 오래 하고 있는데다, 사람이 곧아서, 부러질망정 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때문에 얻은 별명이다. 백묵을 깨물어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만, 그와 함께 앉아 보면, 백묵 씹는 맛이 그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중략) 남이에게, 사는 재미가 어떠냐고 물은 적이 몇 번 있다. 오빠, 백묵 씹는 맛이에요, 남이가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다.(114)

 

○ 하 대령은, 장군이 되는 데 실패한 직업군인이었다. 그가 장수하지 못한 것은 열화 같은 성미와, 반평생을 몸 바쳤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별을 달아주지 않은 군대에 대한 배신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일본으로 쳐들어와, 남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끌고 나리타 공항으로 압송한 것은 전역 직후의 일이라서 그렇다.(119)

 

○ 그래요. 제 세월이 억울해요. 우리 신랑 세월이 억울해요. 저런 것 때문에 내가 그 험한 세월을 그리움 속에서 보내었나 싶어서, 억울해 죽겠더라고요. 우리 신랑을, 저런 것 때문에 속 썩이고 살게 했다고 생각하니 불쌍해 죽겠더라고요.(중략) 학교 앞으로 가서 백묵을 불러내었어요. 평소에 않던 짓을 하느냐고 하대요? 평소에 안 보던 꼴을 보았다고 했어요. 백묵을 붙잡고 펑펑 울었어요. 미안하다면서, 억울하다면서 펑펑 울었어요. 완패였어요. 백묵의 완승이었어요.(125)

 

세상에, 시집 한 권 눈에 띄는데, 제목이 제 눈을 확 끌어당기는데.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거예요, 세상에.(127)

 

○ 제발로 돌아온 남이가 가장 확실하게 돌아왔겠다 싶었다. 남이가 제 발로 돌아오게 한 백묵이 가장 확실하게 돌아오게 만들었다 싶었다. 두 사람이, 하나는 백묵으로 하나는 칠판으로 가장 확실한 지도를 그리겠다 싶었다.(128)   

 

● 이윤기의 소설집 《노래의 날개》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대부분의 단편에서 시와 노래를 주제와 연결하고 있다. 10년만에 다시 읽으니, 어떤 것은 기억에 남아 있고 어떤 것은 새롭다. 〈봄날은 간다〉와 〈지도〉가 나는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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