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도 좋지만, 소설은 더 좋다. 몇 번을 읽어도 물리지 않는 스콧 피츠제럴드 최고의 명작!
○ 버튼 씨는 딸랑이를 사와서 벤자민에게 내밀며 단호한 어조로 "갖고 놀아"라고 말했다. 벤자민은 따분한 표정으로 딸랑이를 받아 들고는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135)
○ 벤자민에 대한 반감이 차차 누그러지면서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무척 즐기게 되었다. 실제 나이와 인생 경험의 깊이는 사뭇 달랐지만 두 사람은 몇 시간씩 한자리에 앉아 오랜 벗처럼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대해 중얼중얼 얘기를 나누었다. 벤자민은 부모보다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의 부모는 권위적으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면서도 벤자민을 다소 어려워해서 종종 그를 "벤자민 씨"라고 부르기까지 했다.(137)
○ 1880년 벤자민 버튼은 스무 살이 되었다. 생일을 기해 로저 버튼 철물도매상사에 첫 출근을 했다. 같은 해 '사교계 진출'도 시작했다.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몇몇 상류 사회 무도회에 참석한 것이다. 쉰 살이 된 로저 버튼은 점점 아들과 죽이 잘 맞았다. 그 무렵 벤자민은 여전히 희끗희끗한데도 머리를 염색하지 않았는데, 외모로는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형제로 보였다.(142)
○ 6개월 뒤, 힐데가드 몽크리프 양이 벤자민 버튼 군과 약혼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여기서 내가 알려졌다고 표현한 것은 몽크리프 장군이 정식으로 약혼 발표를 하느니 칼 위로 엎어져 자살하겠노라고 했기 때문이다. (146)
○ 벤자민의 불만은 날로 커져갔다. 1898년 미서(美西) 전쟁이 발발하자 집에 거의 애정이 남지 않은 그는 육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사업적 역량을 발휘하여 대위 계급을 획득했고 군 생활에 잘 적응하면서 소령이 되었으며 마침내 중령까지 이르렀다. 때마침 유명한 산후안 언덕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그 전투에서 그는 가벼운 부상을 입고 훈장을 받았다.(149)
○ 벤자민은 지난 25년간 철물도매상사를 열심히 경영해 왔으니 이제 그만 최근에 하버드를 졸업한 아들 로스코에게 사업을 물려줄 때가 되었다 싶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종종 벤자민과 그의 아들을 착각했다. 그럴 때면 벤자민은 기분이 좋았다. 미서전쟁에 참전했다 귀향했을 때 엄습하던 두려움은 잊힌 지 오래였고 날이 갈수록 젊어지는 외모에 그는 흡족해 했다. 아내는 그의 흥을 깨는 유일한 존재였다.(152)
○ 1920년 로스코 버튼의 첫 아기가 태어났다.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한 파티가 열리는 동안, 사람들은 집 안에서 장난감 병정과 서커스 모형을 갖고 노는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작고 지저분한 소년이 아기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159)
○ 어린아이가 된 벤자민의 꿈에 괴로운 기억은 머물지 않았다. 용감한 대학 시절과 수많은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로 매력 넘치던 시절의 추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아용 침대를 둘러싼 희고 안전한 벽, 나나, 가끔 그를 보러 오는 한 남자, 그리고 해질 무렵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나나가 창밖을 가리키며 "해"라고 부르던 커다란 오렌지색 공이 있을 뿐. 해가 사라지면 졸음이 와 눈이 스르르 감겼다. 어지러운 꿈 같은 건 꾸지 않았다. 과거 부하들을 이끌고 산후안 언덕 위로 돌격한 그때, 사랑하는 힐데가드를 위해 바쁜 도시에서 여름에도 땅거미가 질 때까지 열심히 일한 신혼 초의 5년 간, 먼로 거리에 있던 예전 버튼 가문의 음울한 저택에서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밤이 깊도록 담배를 피우던 시절. 그 모든 기억이 마치 일어난 적도 없는 듯 벤자민의 머릿속에서 실체 없는 꿈처럼 희미하게 사라져갔다.(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