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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이윤기)

단편소설

by 빈배93 2024. 2. 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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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을 기억하기 위해 나무를 심는 사람, 시간에 매달 방울로 나무를 심는 사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떠오르게 하는 단편 소설. 우리가 시간에 매달, 시간이 흘러서 금방울이 될 방울은 무엇일까?

 

○ 신학대학 선배인 김민우. 어디서 목사 노릇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나무 장사 하고 있었다. 하기야 신학대학 뛰쳐나간 사람이 목사 되기가 쉽지는 않았겠다. 경상도 봉화의 갑부집 아들이라고 했다. 신학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런 소리를 하고 다녔다. 우리 아버지 잘 나갈 때는, 기차 하나 가득 춘양목 목재 싣고 청량리역에다 부리고 하룻밤에 술집에 한 곱배(輛), 수청든 춘향이에게 한 곱배. 그 죄 대속하느라고 내 고생이 심하다, 심해.(86)

 

○ 21세기가 시작되는 해인 2001년 오월, 저의 작업실 앞에서 여섯 그루의 잣나무가 자연 발아했어요. 칠십 년 가까이 된, 제 작업실 앞의 잣나무에서 떨어진 잣에서 발아한 것이지요. 잣 깍지 쓰고 세상으로 나온 아기 나무가 잣깍지를 벗는 것까지 저는 관찰했어요. 21세기의 시작을 기념할 만한 나무 같아서, 돌멩이를 주워, 사람이나 짐승이 아기 나무를 밟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만들어 두었어요. 한 해 동안 5센티 크기로 자라나더군요. 칠십 년 뒤에는 아름드리로 자라나 있겠지요. 저는 아기 잣나무와 늙은 잣나무를 갈마들이로 바라보면서 결심했어요. 시간을 기억하고, 세월을 기억하는 데 필요한 눈금을 땅에다 새기고자 결심했지요.(99)

 

○ 인마, 왜 세월을 믿어? 왜 시간을 믿어? 친구들 깔보기는 내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늘 자신만만하게 친구들을 깔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차례로 졸업하는 걸 보는 내 마음은 착잡했다. 가까운 친구들이 박사학위를 받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내가 어설프게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아, 시간에다 방울을 매달면 언젠가 그 방울은 금방울이 되는 것이구나! 나는, 언젠가는 금방울이 될, 여느 방울 하나 매달지 않은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구나. 내 손으로 방울을 매달지 않은 채 흘려보내는 세월, 나의 방울을 달지 않은 채 흐르는 세워, 그 세월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103)

 

● 이윤기의 소설집 《노래의 날개》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대부분의 단편에서 시와 노래를 주제와 연결하고 있다. 10년만에 다시 읽으니, 어떤 것은 기억에 남아 있고 어떤 것은 새롭다. 〈봄날은 간다〉와 〈지도〉가 나는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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