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진실을 보지만 이내 말하지는 않는다> [톨스토이 단편선Ⅱ], 톨스토이, 푸른숲, 2007.
나는 마음이 무거울 때면,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는다.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지만, 톨스토이 소설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위안을 받는다. 그래서 책상 위에 언제나 톨스토이의 책을 놓아 둔다.
<신은 진실을 보지만 이내 말하지는 않는다>의 줄거리는 이렇다.
세상을 살다보면 억울한 일들이 종종 있다. 보통은 따지고 화내고 서운해하다가 체념하는 경로를 따른다. 억울한 일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딱히 정답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관점에 따라 이것이 정답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정답이 되는 문제이니. 톨스토의의 단편 <신은 진실을 보지만 이내 말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문에 대한 좋은 대답이다.
이 단편소설을 읽고 한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톨스토이가 말하고자한 끝자락이나마 잡았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오만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말해보자.
악쇼노프는 세묘노프에 대해 이런 생각들을 하였다.
‘내가 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를 갚고 싶다.’
‘무엇 때문에 저런 자를 용서해야하는가?’
상대방에 대한 분노, 자신의 파멸까지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심정.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였다. 신이 인간에게 진실을 말하는 순간은 그 모든 원망이 사라지는 순간이거나, 그보다 한참 뒤이다.
자신의 잘못을 비는 세표노프에게 악쇼노프는 이런 말을 하고 영혼의 평안을 얻는다.
“신이 자네를 용서하겠지. 어쩌면 내가 자네보다 백 배 더 나쁜 인간일지도 몰라!”
누명을 쓴 사람이 누명을 씌운 사람보다 더 나쁜 인간일 수도 있다는 기막힌 역설의 이면에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 본다.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사람이 신에 더 가까이 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세묘노프 덕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악쇼노프. 그에게 세묘노프는 역설의 스승이었다. 악쇼노프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결국 돌아가지 못했지만, 영혼의 안식처를 얻었음이 틀림없다.
용서를 비는 것은 인간이지만, 용서를 하는 것은 신이다. 용서를 비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신에 더 가까이 있다. 잘잘못을 가리기 보다는,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하는’ 그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준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용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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