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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필], 사법제도의 어두운 그림자

독서

by 빈배93 2011. 9. 1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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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필, 존 그리샴, 문학수첩, 2008.

 

존 그리샴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6,7년 전이었던가, 제자 하나가 난데없이 책을 선물해왔다.(교직 경력 12년에 학생에게서 책을 선물 받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읽게 된 것이 존 그리샴의 불법의 제왕이었다.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무슨 불교서적인 줄로만 알았다. 불법의 제왕은 집단소송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악한 음모를 묘사한 소설이다. 애초 별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감탄을 연발하였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이것이 법조인의 모습이란 말인가’ ‘집단소송이 가지는 위력이 어마어마하구나뭐 이런 감탄이었다. 여담이지만 그 때 책을 선물한 여학생은 법대로 진학을 했다. 그리고 사법고시를 쳤고, 지금은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여학생의 아버지가 현재 나와 같은 학교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어필은 존그리샴의 또 다른 법정스릴러물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살충제를 만드는 크레인사라는 대기업이 있다. 크레인사는 비용 때문에 작은 마을의 상수원에 수년간 유독성 폐기물을 버린다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암에 걸린다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고통스러워 한다. 이에 격분한 그 마을 출신의 변호사 페이튼 부부가 집단소송을 건다. 법정의 배심원단은 크레인사에 유죄판결을 내린다. 기업주 트루도는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유죄판결에 불복한다. 그리고 대법원으로 상고를 한다. 트루도는 대법원에서 원심을 뒤집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친기업적인 판사를 심기 위해 대법원 판사 선거에 몰래 개입하게 되고, 엄청난 물량과 금전을 투입한다. 결국 친기업적인 판사인 론 피스크를 당선시킨다. 트루도는 배심원단의 유죄판결을 뒤집게 되고, 이로 인해 주가 상승을 실현하여 더 큰 수익을 얻는다.”

 

어필을 읽으며 우리의 사법제도와 선거문화에 대한 회의를 하게 되었다. 소설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상당히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소설 속의 대법원 판사 9명은 세 성향으로 나누어진다친기업적 성향의 판사 4친서민적 성향의 판사 4, 중도 실용주의적 성향의 판사 1.  트루도가 겨냥한 것은 중도 실용주의적인 판사였다. 트루도에 의해 선택된 판사 론 피스크는 자신의 선택이 정당하다고 굳건한 믿음을 가진 채, 친기업적인 성향의 판결을 내린다. 결국 유독성 폐기물을 버린 크레인사에 무죄를 선고한다. 개인의 성향은 개인의 문제이니, 그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지만 대법원 판사은 일개인이 아니다. 판사가 어떤 성향에 의해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문제가 많다. 판사 뿐만 아니라 법조인의 기본은 '인간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을 살맛나게 만드는 것은 냉철한 지성이 아닌, 따뜻한 인간애가 아닌가.

 

법조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할까? 확실한 것은 결코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추구하는 가치가 돈이라면, 결국 법조인 역시 돈 많은 이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작금의 현실이 돈에서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문제긴 문제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법원에 간다그런데 법원에 가기 위해서 망설여야 한다. 긴 소송기간 동안의 정신적 물질적 고통이 그리 만만치 않다소송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해 볼 때, 법 앞의 평등은 그저 하나의 말일 뿐이다. 소송기간을 줄일 수 없을까법조인의 숫자를 늘인다면 가능은 하다. 하지만 늘 돈이 문제다. 법조인이 늘어나면 그들의 희소 가치가 떨어지고, 결국 수입이 줄어든다법조인 스스로가 그 숫자를 늘이기를 원치 않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현재 3심 재도는 가장 진화한 형태의 사법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불평등하기만 하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소설의 내용에 의하면,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는 뒷거래와 밀약, 그리고 더러운 술수들이 난무한다. 평범한 서민으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그런 행태 말이다. 작금의 현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생각할 줄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선거는 과연 유용할까? 각자의 이익관계에 의해 투표를 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니 그게 오히려 투표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선거에서만은 평등할 것이란 생각은 말자.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선거는 근본적으로 불공평한 요소를 갖고있다 방송과 언론, 인력과 자본을 장악하는 그들은 언제나 선거에서 승리하고, 다시 막대한 부를 가져오는 선순환을 한다. 가지지 못한 자는 언제나 소수가 될 뿐이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육성이 갖는 이점도 많다. 하지만 그만큼의 해악도 존재한다.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되는 세상에서 가진 자들은 끊임없이 더 갖기를 원한다. 파이를 키워서 더 많이 나누자는 이야기는 그들의 변명일 뿐이다. 소설 속에서 대기업은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고, 선거판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사법부와 행정부조차 그들의 사람들이 심어놓고 있다. 그게 왠지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해결책? 있지만 실현은 지난하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국민들이 공유하고, 결코 국민들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일개 국민일 뿐인 우리가 우선 실천 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논의는 위험하다. 하지만 생존이라는 게임에서 저들은 일방적이고 용의주도하게 몰아붙이는데, 국민들만 도덕성을 논하고 페어플레이를 한다는 것이 어쩌면 어리석을 지도 모른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인류애요 도덕성이다. 그래도 나만 그렇게만 해야만 한다는 것이 어째 영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나는 이런 사법제도의 불합리성과 선거제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독서를 생활하자. 글을 쓰자.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자. 내 생각이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가를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만만하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들도 마음대로 우리를 농락하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결국은 생각할 줄 아는 국민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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