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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일공통 역사교재, [조선통신사]

독서

by 빈배93 2011. 10.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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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 한길사, 2005.

 

내 전공이 한문학이다 보니,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논문들을 꽤나 읽었다. 그럼에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관심은 남아 있었나 보다. 그래서 조선통신사를 집어 들었다.

 

조선 통신사는 한국과 일본의 중등교사가 함께 만든 최초의 한일공통 역사교재이다. 이 책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균형적인 시각으로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한국 집필진은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일본 집필진은 친한파로 비칠까봐 두려웠다고 한다. 그만큼 양국의 역사인식은 민감한 사안이다. 이 책은 집필진의 용기와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성과물이다.

 

이 책은 과연 균형 잡힌 시각으로 써졌을까? 두 나라 사람이 협의가 균형과 공정함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상호간에 눈치 보기로 더 못한 결과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으로 두 나라의 집필진이 함께 인정하는 내용을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은 분명하다.

 

이 책은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행을 다루고 있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을 통해 이 책을 소개 한다.

 

전쟁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는 2,3만으로 추정된다. 전후 조선의 송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조선인이 자진해서 일본에 남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유학자도 있었고, 도공도 있었고, 평범한 농민과 어민도 있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상당한 대접을 받고 살았다. 그저 먹고 살 방도만 마련되면, 나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반대로 전쟁 때 조선에 투항한 왜군도 많다, 무려 1만 명으로 추정된다. ‘사야가라는 왜의 총포부대장은 특별하다. 전쟁 한 번 하지 않고 투항해서, 조선을 위해 싸웠다. 나중에 임금으로부터 성을 하사받고 김충선으로 개명한다. 사후 정헌대부의 품계를 하사 받았다.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대구광역시 달성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한다.

 

통신사의 규모는 거대하였다. 일본 쪽 수행원까지 합치면 그 수가 2,000명에 육박하였고, 짐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배가 300척에 달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최대의 퍼레이드였다. 최근 부산에서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직접 보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너무나 아쉽다.

 

일본 도자기의 시조는 조선인 이삼평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납치되었다. 실력이 있으면 어디서든 인정을 받나보다. 그의 비석이 남아있는데 그 비명이 이렇다.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지금도 매년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의 자손들은 여전히 도자기를 만들고 있고. 명실 공히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의 시조로 인정받고 있다.

 

임진왜란은 두 나라 모두를 폐허로 만들었다. 폐허의 상처 속에서도 건진 것이 있다면, 비록 강압적인 것이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가 아닐까? 일본 곳곳에 조선의 흔적이 남아있고, 우리나라 역시 일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 전쟁이지만, 이런 문화적 교류가 천만분의 일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이런 걱정이 살짝 든다. 이 책의 집필진은 전교조에 소속된 교사들이다. 때문에 시비를 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제발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그들이 이런 노력이라도 하는 동안, 시비 거는 자신은 뭘 했는가 자문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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