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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댁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어머니의 꿀밤 떡

독서

by 빈배93 2011. 10. 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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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댁이(1952), 정통한국 문학대계, 어문각, 1994.

 

    내가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는 부업을 하셨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와이셔츠를 집으로 가져와 지저분하게 핀 실밥을 자르는 일이었다. 한 번에 100장도 좋고 200장도 좋았다. 집에서 공장까지는 15분은 족히 되는 거리였다. 어머니는 그 때도 허리가 불편하셨다. 그래서 조그만 손수레에 와이셔츠 뭉치를 싣고 끌고 오는 일도 만만치 않으셨다. 매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일은 자주 내 차지가 되었다.

 

    당시 손수레를 몰면서 혹시라도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나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이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란 생각으로 앞선 생각들을 재빨리 몰아내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 생각해보니, 철 아닌 철이 일찍 났던 모양이다. 부모님과 부모님의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당연한 말이건만 새삼스럽게 다가온 것은 오영수의 단편 화산댁이때문이었다.

 

    「화산댁이는 시골 할매 화산댁이의 둘째 아들 방문기이다. 화산댁이는 두메산골에서 큰아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경주 시내에 사는 둘째 아들은 장가를 든 이후로 발길이 끊어지다시피 하였다. 때마침 시내로 나가는 차편에 실려 둘째 아들 가족을 만나러 간다.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룬다.

 

    이 소설은 과거vs현재’, ‘산골vs도시’, ‘엄마vs자식의 대립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 한다. 부모 자식 간에 누가 이겼을까를 논하는 것이 우습지만, 누가 이겼을까? 자식이다.(세상에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이 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손녀를 위해 꼭꼭 간직해 두었다가 내어놓은 꿀밤 떡. 그꿀밤 떡을 화산댁이가 쓰레기통에서 발견하는 순간, 어미의 패배로 못이 박힌다. 그리고 조용히 두메산골로 귀향을 한다.

 

화산댁이는 돌아 나왔다. 그새 행여 아들 내외가 깼을까 싶어 조마조마 문간을 들어오면서 무심코 들여다본 쓰레기통에 도토리 떡이 보자기째 내버려져 있었다. “아이구짜고, 시상에 죄받을 짓도 했다!” 화산댁이는 얼핏 들어내 치마 밑에다 감췄다. 쓰레기통에는 짚신도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어느새 화산댁이의 눈앞에는 두메 손자들의 얼굴이 자꾸만 얼씬거렸다. 도토리 떡을 흥흥거리고 엉겨들다 쥐어박히고 떼밀려 찌그러지고 우는 얼굴들이었다. (중략) 화산댁이 눈시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핑 돌았다. 해가 한발쯤 돋았을 무렵, 어제와 꼭같은 보퉁이를 들고 어제와 꼭같은 짚신을 신은 화산댁이는 경주가도를 향해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55)

 

 

    남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건만, 그놈의 둘째 아들놈은 참 얄밉다. 제 어미가 살아온 세월을 고스란히 보아왔으니, 이해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건만. 그것도 아니라면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으로, 이때껏 키워주고 보살펴준 어머니의 경제적 가치를 계산해 값던가. 그건 또 부모 자식 사이라는 인간적인 관계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테지만. 도시적 세련미가 이런 비인간적인 것이라면, 기꺼이 포기하는 것도 좋은 결정일 것이다.

 

    내 장모님은 유독 걱정이 많으시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식이 하나면 걱정이 하나고, 자식이 다섯이면 걱정이 다섯이다. 그래도 안 서방(빈배)과 미야(빈배 아내)는 둘 다 교사니, 내가 별 걱정이 없다.” 내 어머니도 그런 말씀을 가끔 하신다.

 

    『논어에 보면 부모는 오직 자식이 아플 것만 근심하시게 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님이 피할 수 없는 으로만 자식에 대해 근심하게 해드려야지 효도라는 것이다. 취직을 못해서, 장가를 못가서, 나쁜 행실 때문에 부모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불효라는 것이다.

 

    그것만 내 부모님이 걱정토록, 그렇게 살아지기를 바래본다. 내 아이를 낳고 보니,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된다. 자식은 부모에게 언제나 걱정일 뿐이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불공평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여기서 자식이 부모에게 '혼정신성昏定晨省'해야 하는 이유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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