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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산 여행기] 구덕령 꽃마을

잡동사니

by 빈배93 2011. 12. 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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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덕령 꽃마을과의 인연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가 본 산? 동네 뒷산 지금껏 내가 가장 많이 간 산은 금정구에 있는 윤산이요, 두 번째로 많이 간 산은 금정산이요, 세 번째로 많이 간 산은 승학산·구덕산·엄광산이다.(세 산은 이어져 있는데, 정확히 어디가 무슨 산에 해당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앞의 둘은 동네 앞 산(금정산)이고 뒷 산(윤산)이라서 그렇고, 세 번째로 많이 간 산은 직장 뒷산이기 때문이다.

 

    불과 몇 해 전만해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면 일찍 퇴근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세월이 바뀌었다. 퇴근 불가! 만일 집에 갔다가 복무 감사에라도 걸리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니. 시험을 마친 학생을 두고 무슨 수업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집에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나온 결론이 각종 협의회나 교직원 등반과 같은 공식 행사였다. 그래서 나는 일 년에 반드시 4번을 승학산·구덕산·엄광산을 밟고 그 종착지인 구덕령 꽃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다.

 

    산은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같은 산을 매번 오른다는 것이 식상하기도 하다. 그래도 어쩌랴?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등산 출발지로 가는 길이 번잡해지니. 매번 장소를 바꾸어볼까 고민도 하지만 언제나 종착지는 '구덕령 꽃마을'이다.

 

산적바위와 망바위에 얽힌 이야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못 보던 벽화가 눈에 띄었다옆에는 벽화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있는데, '구덕령 꽃마을'의 소사小史가 적여 있다. 마침 이곳의 역사가 궁금하던 차였다. 그 내용은 이렇다.(문장을 개인적으로 손을 보았다. 긴 문장은 질색이라.)

 

    “구덕령 꽃마을은 구덕산과 엄광산 사이에 위치한 해발 226m의 고갯길 위에 있는 마을이다. 19세기 개항과 더불어 새 길이 나기 전까지 부산포에서 구포장을 연결하던 유일한 지름길이었다. 보부상들은 이곳을 넘나들며 땀을 식혔고, 주막에선 목을 축였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산적들이 보부상을 상대로 도적질을 일삼기 시작했다. 산적들은 고갯길 뒤편 큰 바위 뒤에 숨어서 보부상이 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돈과 물건을 빼앗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가리켜 산적바위라고 불렸다. 사람들의 피해가 커지자 보부상들은 그 고갯길을 지날 때면 반대편 언덕의 바위 뒤에 숨어 산적바위뒤에 도적떼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는 피해 다녔다. 그래서 그 바위는 망바위라고 불렸다.”

 

    벽화 속에서 숨어있는 산적과 망을 보는 보부상들을 보고 왠지 모를 웃음이 났다. 보부상의 입장에서는 삶과 죽음이 오가는 현실인데 웃음이 났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래도 그 시절의 보부상은 최소한 누가 적인지는 알 수 있었으나,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사를 주관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를 알지 못한 체 힘들어하고 있다. 그래서 산적과 보부상의 신경전이 정겹게 다가왔던 것이다. ‘산적바위망바위를 직접보지는 못했다. 다음 산행 때는 챙겨볼 심산이다.

 

    벽화는 이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그렸다고 한다. 미술작가가 이야기를 조사하고, 아이들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우리의 아이들이 그린다는 것! 흐뭇하고 기특한 일이다. 문화에 대한 홀대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통해 관官이 아닌 개인으로부터 피어나는 우리 문화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구덕령 꽃마을의 어제와 오늘

 

    ‘그 뒤 꽃마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왜 꽃마을이라고 불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이는 다음의 [위키백과]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문장은 뺄 것은 빼고 자를 것은 잘라서 손을 보았다.)

 

    “부산시 서구 서대신 410·11통 지역을 꽃마을이라 부른다. 꽃마을은 서대신 4동과 사상구를 연결하는 해발 220m의 고개에 위치한다. 옛날 이 곳에는 조그마한 주막집이 몇 채 있었다고 한다. 6.25동란 전후 피란민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주민 대부분이 꽃 재배를 생업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꽃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2003년 마을 진입도로가 확장되고 현대식 건물들이 새로 들어서면서 현재는 많이 달라졌다. 현재 1,300명 남짓한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꽃 재배를 하는 이는 거의 없다. 구덕산과 승학산을 찾는 많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닭고기·오리고기와 막걸리와 시래기 해장국 등을 파는 음식점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주막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리고기집이 들어섰고, 보부상이 떠난 자리에는 등산객이 들어섰다, 산적을 피해 망바위에서 두리번 거리던 보부상과 갑갑한 도시생활을 피해 산으로 올라온 등산객들의 모습이 겹치면서 이곳 꽃마을은 과거와 현재를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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