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콘서트 1』(이숲, 2011.)를 읽었다. 한국정책방송 KTV에 방송된 13편의 대담을 담고 있다. 어떤 편은 지루하기도 하지만, 서너 편은 대단히 흥미롭다. 일례로 서강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김영한의 「유토피아를 꿈꾸다」가 그랬다. 김영한 교수는 무슨 말을 했을까?.
“유토피아가 실현되면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니죠. 그런 뜻에서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공상만은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유토피아가 ‘not yet’,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것을 기획하고, 설계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영원히 실현되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늘 새로운 꿈을 불어넣어 주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을 보면 거기엔 오히려 부작용이 아주 많습니다. 대개 폭력이나 억압이 동원되지요. 왜냐하면 이상 사회는 가장 좋은 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한테는 두 개의 사회가 있을 수 없고, 오직 하나의 완벽한 사회를 추구하지요. 그래서 그 이념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제거되거나 배제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이유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칼 포퍼 같은 철학자입니다.”
꿈과 희망, 그리고 유토피아! 내 짧은 소견에 이 말들에 대한 부정은 지금껏 악惡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이 가지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작년 이 맘 때쯤 ‘긍정’에 심취했다가, 그 과정 속에서 ‘긍정’의 부정적인 측면을 생각하긴 했었다. 그 당시의 내 결론은 “강요된 긍정은 강력한 억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유토피아의 추구에 폭력과 억압이 동원된다는 칼 포퍼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아, 나는 똑똑해.)
우리 사회에는 자칭 타칭 진보론자들이 많다. 좁은 내 소견에 ‘진보=이상 사회’라는 공식이 들어 차 있다. 물론 이상 사회에 대한 꿈이 진보론자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이상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진보=이상사회’라는 공식이, ‘보수=이상사회’라는 공식보다는 덜 낯설다. 나만 그런 것일까? 진보론자도 보수론자도 모두들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내가 그리는 유토피아 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은 위험천만이다. 나의 유토피아가 너의 디스토피아라고 말하면 너무 과할까?(신이시여 이 말을 제가 썼단 말입니까?)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을 갖고 유토피아를 추구한 사람이 꽤나 있다. 그 결과는 대부분 비참했다. 히틀러도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추구가 이렇게 위험성을 내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완전하게 태어난 인간이 완전한 신을 닮아가려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자답을 해본다. 스스로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려는 겸손한 노력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완벽하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유토피아에 다가 가기 위해서는 ‘폭력’과 ‘억압’이라는 두 마리의 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학기를 맞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이상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분주하다. 그 속에 어떤 ‘폭력’과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성급히 이상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기 보다는, 어제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일이다. 아울러 나라는 존재 안에 나만의 유토피아를 세우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과 ‘억압’ 역시 잘 살펴야 한다.
인문학 콘서트
2012년 1월 · 2월 독서목록 정리 (0) | 2012.03.09 |
---|---|
우화 문학의 백미, [라 퐁텐 우화집] (0) | 2012.03.08 |
[거인 사냥꾼을 조심하세요] 숲의 거인과의 대화 (0) | 2012.03.05 |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신자유주의의 두 얼굴 (0) | 2012.03.03 |
읽고 싶은 책, 서재에 가득 채우라! (0) | 2012.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