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자취가 켜켜이 내려앉은 경주. 올들어 세 번째 발걸음이다. 경주 톨게이트에서 얼굴무늬 수막새를 만나면, 비로소 경주에 닿았음을 실감한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얼굴무늬 수막새는 깨어진 체, '천 년의 미소'를 담고있다. 천 년 전에는 둥글어서 온전했을 터인데, 지금은 깨어져서야 온전하다. 어떤 이는 톨게이트의 수막새를 보고, '천 년의 미소'를 봤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마저도 못봤다고 한다. 사람은 천 년을 보려하나 보지 못하고, 천 년만 말갛게 제자리에 앉아 있다. 천 년은, 이 물가 저 언덕 한 구석에 소리 없이 엎드려서, 깨어진 기왓장으로, 무너진 석탑으로, 닳은 미소의 불상으로, 속살을 드러낸다.
△ 얼굴무늬 수막새 ⓐ 경주 톨게이트. 경주. 2012.08.16.
볼 수 없는 천 년이, 차마 보기 어려운 오늘을 움켜쥐고서, 천 년을 새로 써간다. 보문단지에 늘어선 수많은 가게 속에서 한 철 한 몫을 단단히 쥐려는 사람들. 땡볕 아래 관광지 곳곳을 가꾸는 사람들. 도로변에 늘어선 행상들. 모두가 천 년을 먹고 살고, 천 년 또한 기꺼이 그들을 먹여 살린다. 오늘에 새로 남긴 자취는 지난 천 년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천 년 덕에 이곳 사람들은 먹고 살고, 간난한 삶을 사는 이들은 천 년이 여전히 진행형임을 증명한다.
△ 얼굴 무늬 수막새 ⓐ 경주박물관. 경주. 2012.08.17.
휘황하고 찬란했던 시절의 석가와 다보도, 병들고 아팠던 시절의 포석도, 이제는 휘황하지도 찬란하지도 병들지도 아프지도 않다. 천 년은 모두를 무던하게 하였다. 무던한 것은 오랜 것이고, 오랜 것은 정겨우며, 정겨운 것이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다.
아프고 병들고 가난하고 배고픈 것은 슬프다. 아프고 병들고 가난하고 배고파서 슬퍼도, 흔적만은 남았으면 한다. 흔적마저 스러짐은 슬픔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다. 힘겹게 살아온 오늘의 자취가, 켜켜이 쌓여서 남았으면 좋겠다. 그림으로, 조각으로, 노래로, 이야기로, 어떻게든 남아야 한다. 남아서 속살을 들어내는 천 년은 경건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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