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만인가요? 오랫만에 갈맷길을 나셨네요?
주말은 원래 안 나가는 거고, 월요일에는 게으름을 피웠어요. 오늘 아침에도 나설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섰어요. 오늘 안 나가면 계속 안나갈 것 같아서요. 인간의 행동에도 확실히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계속 하고 있으면 그냥 하게 되는데, 한 번 멈추면 쭉 멈추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아요. 관성을 깨기 위해서는 '그냥 하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입니다.
오늘 다녀온 코스를 말씀해 주실래요?
주말부터 아침 저녁으로 시원해진 것 같아요. 지난주보다는 한결 걷기 좋았습니다. "0940 부산진시장 - 1025 증산공원 - 1045 성북고개 - 1150 초량성당 -1230 용두산 공원 - 1240 부산근대역사관 - 1310 자갈치시장"의 코스였어요. 총 12.5km의 거리를 3시간 30분 동안 걸었어요. 바다와는 상관없는 도심길이라서, 영 별로일 것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좌천동∼수정동 산복도로가 의외로 괜찮았어요. 증산공원 찾는데는 좀 애를 먹었어요. 갈맷길 표지를 신경써서 보고 갔는데, 어느 순간 놓쳐버렸거든요.
△ 수정동 산복도로에서 바라본 풍경 ⓒ빈배
산복도로 아래 위로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는 모습이 이채롭네요?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가 저랬어요. 어른 둘이 지나가기가 어려운 좁은 골목길에, 당장이라도 무너지 것 같은 슬레이트 지붕에, 버스 한 번 타려면 10분을 걸어나가야하는 것까지…… 수정동 좌천동일 대의 산동내는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민들이 정착해서 만들었다고 해요. 어머니에게 들은 말인데, 당시 한 미군이 이 산동네를 보고 "저쪽에 반짝이는 별들이 참 많네"라고 말했답니다. 피난민촌을 조롱한 말은 아닌듯해요. 미국 어딘가의 광활한 땅에서 살던 미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빌어먹을 표현이지만, 확실시 산동네는, 산아래 동네에서, 밤에 바라봐야, 근사하지요. 그 미군의 말은 어이없기도 하지만, 가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꼭 맞는 말이지요.
△ 부산시 동구의 상징 이미지 ⓒ빈배
산동네에 사는 사람이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며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에게 멋진 야경만을 제공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요.
어느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지요? 저도 그말이 인상깊었어요. 자본주의와 빈자貧者의 관계를 그보다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싶어요. 산동네에 사는 사람이 본 산아랫 동네는 환상이지요. 언젠가는 자신도 그 속에서 살고 싶은…….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그 환상을 쫓아 매일 산아랫 동네로 일을 하러가고, 저녁이 되면 초최한 몰골로 그들의 현실로 돌아오지요. 별처럼 반짝이는 산동네로……. 반면에 산아래에 사는 사람에게는 산동네가 환상입니다. 별들이 반짝이는 마을로서, 자신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낭만의 장소로서 말입니다.
△ 수정동 산복도로 풍경 ⓒ 빈배
산복도로에서 벽화를 많이 보셨다면서요?
벽화 하나를 보고 눈을 돌리면 오래지 않아 다시 다른 벽화를 볼 수 있었어요. 전국에 유명한 벽화마을을 생각해보세요. 평지에 있는 번듯한 동네에 벽화마을이 조성된 경우를 본적이 있나요? 당연히 없지요. 벽화마을이란게 대부분 가난한 마을에 도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이래저래 가난한 산동네에는 이제 벽화가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린 듯해요. 그런대 벽화가 그려진 마을에 사는 사람이 저 벽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요. 또 저 벽화를 구경하러온 사람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하고. 제 옛 기억을 더듬어보면 가히 유쾌한 기분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 용두산 공원 ⓒ 빈배
남은 이야기를 해주실레요?
오늘 걸은 곳 중에 유명한 곳이 참 많았어요. PIFF광장, 용두산 공원, 깡통시장, 자갈치시장 등등. 그런데 평소에 워낙 자주 가는 곳이라, 저로서는 크게 할 말이 없더라고요.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알맹이는 쏙 빠진 것이죠. 아무렴 어떻습니까? 제 여행기인데.(웃음) 오늘로써 총 83.4km를 22시간 25분 동안 걸었습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갈맷길 700리 다 걷기는 아무래도 무리인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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