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입학사정관제
입학사정관제를 위한 원서작성 마감일이 임박했다. 고3들이 분주하다. 도움을 요청한 한 아이와의 인터뷰.
“너 진짜로 어릴 때부터 ○○학과에 가고 싶었냐?”
“아니오. 선생님이 한 번 써보라고 하셔서…….”
“그럼 니가 쓴 것 중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아서, 이런 저런 준비를 했다’라는 말은 거짓부렁이네.”
“……,”
특정학과를 염두에 두고 긴 시간 동안 입학사정관제를 준비해 온 학생. 나는 그런 학생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부산의 변두리에 있는 학교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철만 되면, 다들 무슨 준비를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너도나도 원서를 쓴다. 원서의 내용은 천편일률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학과에 관심이 많아서…….’ 쓰는 학생도, 읽는 나도, 읽을 입학사정관도, 모두 안다. 거짓말임을. 아침 7시 30분에 등교해서 10시에 하교하고, 다시 학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준비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이 일찌감치 하나의 학과를 정하고, 합격을 위해 준비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싶기도 하다. 다시 이어지는 인터뷰 내용.
“쫄지 마. 니만 그런 게 아니야. 거짓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합격을 위해 미화하고 과장해. 문제는 솔직하면서도 얼마나 설득력 있는 글을 쓰냐에 달려 있어. 똑같은 팩트를 보여주더라도 어떤 각도에서 보여주느냐가 문제란 말이지. 그럼 일단 니 팩트를 먼저 살펴보자. 그걸 기초로 다시 쓰는 거지. 니가 자랑할 만한 팩트가 뭐가 있냐?”
“선생님 저는 고1때 전교 200등이었는데, 지금은 전교 10등 정도에요.”
“좋은데, 아주 좋아! 이런 경우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거든. 증명 가능한 팩트이기도 하고. 이걸로 니 의지와 노력을 돋보이게 만들어보자.
이렇게 자랑할 만한 팩트가 있을 경우, 글을 쓰기에 쉽다. 문제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실 증명할만한 뚜렷한 활동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TV, 영화, 책에서 이야기를 끌어와서 “감동이었다.” “인상적이었다.”는 둥의 글을 쓴다. 그 감동과 인상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믿음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다시 이어지는 인터뷰 내용.
“그런데 그렇게 성적을 올린 동기가 있을 텐데?”
“중학교 때 가출을 한 적이 있어요. 엄마가 엄청 충격을 받으셨죠. 엄마가 그 정도로 충격을 받을지 저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크게요. 그때부터 내 행동 하나하나가 엄마에게 우리 가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게 되었어요. 그러고 정신 차렸죠.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일이 뭘까 생각했어요. 너무 뻔하더라고요. 공부! 그래서 죽자사자 했죠. 고등학교 입학하고 오늘까지 새벽 2시 이전에는 자본 적이 없어요.”
“아니, 니가 가출을 했었단 말이냐?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나는 이런 시련을 통해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자기소개서에서 이런 식의 서술은 거의 정형화된 방법이지. 사실, 선생님은 그런 글 별로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아. 하지만 가출은 분명 니한테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네.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고. 이거 쓰자.”
“선생님 그런데 이런 내용을 쓰면 오히려 불리하지 않을까요?”
“왜? 시련 없는 인간은 지구상에 없다. 시련으로 무너지는 사람도 있고, 시련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니 마음속에 어떤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는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너의 경우 시련을 발전의 동력으로 사용했다는 걸 니 팩트가 증명하잖아? 쓰자.”
“또 뭐가 있을까? 잘 생각해봐.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 이전의 경험을 잘 떠올려봐.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분명 간접적으로 니 가치관에 영향을 준 사건이 분명 있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내일까지 오늘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글을 써와라. 가급적 짧고 명확한 문장으로. 니가 써놓은 글을 가지고 내일 계속하자.”
단점도 분명 존재하지만, 입학사정관제는 좋은 제도라 생각한다. 올해는 이렇게 도움을 줄 수밖에 없다. 이전에 입학사정관제와 관련하여 내가 한 활동이 전무하니. 스스로도 많이 배웠다. 봉사활동과 특활·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입학사정관제를 위한 원서작성은 결국 글쓰기의 문제다. 글쓰기는 결국 독서와 연결된다. 직접 글을 쓰는 학생도, 그 글을 봐주는 교사도, 폭넓은 독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활동은 전공과 상관없는 교사로서의 중요한 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어떠한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일부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의 일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낸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공강 시간에 인터넷 쇼핑과 뉴스 검색만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은지? 교사로서의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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