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시절 집사람은 내 눈에 완벽한 ‘차도녀’였다. 허름한 내게 아까울 정도로. 아이를 둘 낳은 지금도 대략 ‘차도녀스러움’을 유지하고 있다. 왠 뜬금없는 자랑? 더글라스 케네디의 장편소설 『위험한 관계』를 읽었다. 주인공은 ‘차도녀’의 전형이다. 적당히 아름다운 미모에다, 미혼에다, 기자라는 직업에, 결혼에 대한 환상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그래서 그녀는 ‘So Cool!'한 ’차도녀‘다.
광고 속에서 ‘차도녀’는 대세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깨끗한 빌딩 복도를 또각또각 걸어가는 아름다운 여성. 하이힐 위로 난 늘씬한 다리가 눈부시다. 그런데, 난 소설 속의 젠장맞을 그 ‘차도녀’가 거북했다. 왜냐고? 까칠해서. 인간적인 따뜻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으니까. 아니 인간적인 따뜻함을 의식적으로 감추려고 하니까.
“객관+이성+합리 = So Cool!” 그럴듯하지 않은가? ‘So Cool!'이라는 말은 주체로서의 ‘나’만이 중요하다는 서구 특유의 정서가 집약된 말이다. 애초에는 ‘타자’가 ‘주체’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 차단하고자 ‘So Cool!'의 정서를 기르고 정립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So Cool!'이 ‘타자’가 ‘주체’에게 미치는 좋은 영향마저 차단하게 되었지만. ‘So Cool!'의 정서가 광고계를 장악하고 있지만, 낯설고 문제가 많은 정서임이 분명하다. 도시화·개인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So Cool!'은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서보면 낯선, 불완전한 신화다. ‘So Cool!'을 신봉해보니 ‘외롭다’는 말이다.
‘So Cool!'을 대체할 만한 것은 없을까? 물론 있다. ‘정情!’ ‘정情’에 대해 깡통인 서구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도 어렵겠지만, ‘정情’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유용하면서 강력하다. 초코파이와 박카스가 이를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 동료에게 ‘So Cool!’하기는 쉽다. 그러나 가족에게 ‘So Cool!’하기가 쉽던가? 결코 그러지 못한다. 왜 그럴까? 한국 사회는 가족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So Cool!’이 가져다주는 좋은 영향보다는 나쁜 영향이 더 크다. ‘So Cool’의 정서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말이다. 그래서 허전한 것이다. 그 허전함은 ‘So Cool!'의 정서를 한국 사회에 직접 이식할 때 나타나는 거부 반응이다.
그렇다면 서구는 어떨까? 『위험한 관계』에 의하면, 서구의 중심이랄 수 있는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So Cool!’이 아니었다. 모두가 등 돌린 주인공 ‘차도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그냥 말 몇 마디로 의기투합한 이웃집 아줌마였다. ‘그래? 그런 나쁜 놈이 있단 말이지? 한 번 해보자!’로 그 복잡한 사건의 실마리가 잡힌 것이다. 혹자는 ‘우연’에 의한 갈등 해결이라 혹평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생각한다. 이성에 의한 합리적 판단은 감성에 의한 인간적 공감에 한참을 못 미친다.
아침 출근길에 집사람에게 이성적으로 조목조목 따져가며 말싸움을 했다. 이긴 것 같기는 한데, 통쾌하지 않고 그냥 찜찜하기만 할 뿐이다. ‘그래. 그!냥! 내! 마누라니까 잘! 해줘야지!’라는 이성과 합리가 거세된 단순한 마음! 그것이 세상 사는데, ‘So Cool!’보다는 훨씬 정답에 가깝다. 마누라, 미안해! ‘차도남’도 못되는 것이 ‘차도남’인양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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