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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골 동네에 묻어있는 내 어린 날들의 기억을 회상하며

잡동사니

by 빈배93 2011. 3. 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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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부산진구 범천2동 1042번지.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품었던 공간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우리 동네를 ‘똥골동네’라 부르셨다.(실제로 동네가 세워지기 전에 서면에서 나온 변을 묻었다고 한다.) 시집간 어머니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사시나 궁금해서 와보시곤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슬라브집 일색에,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한데다, 유치원도 다닐 형편이 못되는 아이들이 골목에 가득한 그런 동네였다. 우리 외가는 시골(경상북도 경주군 입실)이었는데, 꽤나 괜찮은 마을이었다. 그런 곳에 사시던 외할아버지의 눈에는 말그대로 ‘똥골 동네’였던 것이다.

 

똥골동네에는 50채 정도의 집이 있었다. 동천을 지나는 다리를 중심으로 해서 두 마을로 나누어졌다. 공통점이라면 동네에 20% 정도만이 집의 소유주였고 나머지 대부분이 가난한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한 세입자였다. 서면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마을이라, 대부분이 부전시장의 영세상인과 서면 유흥가 종사자였다. 그래서 세입자들이 자주 바뀌었다. 소위 마을 유지(당시 우리집은 우리 소유였고 반장집이어서 당당히 유지에 해당했을 것이다.)라는 사람도 지금 생각해보면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기와지붕이나 옥상을 가진 집이 몇  채 있었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똥골동네로 진입하는 길은 딱 두 곳이었다. 서면에서 동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오는 길과 범냇골에서 철도공작창 담벼락 밑을 지나는 길. 우리 동내는 도심 속의 섬이었다. 이 두 곳이 막히면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1982년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해 초가을에 에그니스호 태풍이 불어 동천이 범람하였다. 동네 사람들을 피신할 곳이 없었다. 아버지가 곡괭이 자루를 들고 철도 공작창 벽을 부수고 동네사람들을 피신시키려 하셨다. 다행히 비가 그쳐 피신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지만.

 

 똥골동네 사진이 없어, 당시 동네 분위기와 가장 비슷한 모습을 올려본다  

 

미혜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서너 살 정도 어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 밑에 여동생도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혜네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가끔 책을 빌려서 집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였만 내가 느낀 자매는 참 이쁘고 착한 아이들이었다. 아주 친했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정이 들어가던 어느 날  미혜네가 동네를 떠났다. 뒤에 어머님 말씀을 들어 보니 미혜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이라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어머니는 유흥업소에서 주방일을 하며 밥벌이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업소에서 일을 하다 다른 사람의 시비를 말리다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그 뒤 며칠이 못되어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집에서 키우면 안되나?'하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지금쯤이면 30대 초반의 어쩌면 아기 엄마가 되어있을 텐데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18살 때던가. 똥골동네가 없어졌다. 집 위로 도로가 났다. 세입자들은 쫓겨났고, 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20평이 채 못되는 시영아파트로 이주하였다.(당시 우리 집이란 것도 하천부지의 국유지에 불법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걸로 내 유년의 추억을 간직한 공간은 끝이었다. 서면 근처에 도로를 내기 위해선 엄청난 보상비가 필요했고, 필연적으로 하천부지에 들어선 우리 동네는 철거될 수 밖에 없었다. 철거를 기다리는 비어버린 마을을 몇 번인가 혼자 가보고 눈물을 흘렸다. 몇 년 전까지도 가끔 뺏겨버린 우리 집을 보고 우는 꿈을 꾸었었다.


'권력은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한 번 휘두르면 가장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행사된다. 권력은 가난이라는 심각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 시절, 그 골목길, 그 사람들이 그립다.

 

(1년 전 쯤 한 번 찾아가보았던 적이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미로같은 골목이 남아 있었다. 한 번 꺽고 두번 꺽고 세 번 꺽어 들어가면 우리집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게 꺽어 들어간 곳에는 커다란 도로가 있었다. 한 번 찾아가서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똥골동네의 추억을 찍어야 겠다고 생각한지 한참 되었건만 아직도 차일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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