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색안경을 쓰면 색은 본래의 색을 잃는다. 안경을 쓰면 형상은 본래의 형상을 잃는다. 안경이 원래 그러한 것이다. 맨눈으로 보아도 본래의 색을 잃고 본래의 형상을 잃는다. 물리적 감각 기관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안경도 버리고 눈도 버려야 한다. 눈을 감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보려는 마음마저 거두어야 한다.
2
굽은 자로 재면 굽은 것도 곧은 것이 된다. 굽은 자로 재면 곧은 것도 굽은 것이 된다. 완전히 곧은 자는 수학에서나 있다. 어떤 자로도 현실을 온당하게 잴 수는 없다. 어찌해야 할까? 굽은 자도 버리고 곧은 자도 버려야 한다. 자를 버리고 마음으로 재어야 한다. 재려는 마음마저 거두어야 한다.
3
별도 달도 산도 강도 나무도 풀도 엄마도 아기도 사랑도 평화도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평가 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평가를 위해 태어난 평가 조차 평가 받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평가 하는 놈 치고 평가 받기를 달가워하는 놈이 있던가. 그 무엇이 무엇이든 간에 그 어떤 잣대를 들이대어도 그 무엇에 대하여 온당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평가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지맘대로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책임질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책임질 것처럼 지맘대로 지껄여대는 허세다. 그런데도 1등을 받아든 놈은 웃고, 2등을 받아든 놈은 아쉬워하고, 꼴찌를 받아든 놈은 인상을 구긴다. 평가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면 웃지도 아까워하지도 인상을 구기지도 말라. 평가를 거부하고 기꺼이 등외가 되어라. 100대 추천도서, 내신등급, 수능등급, 교원성과등급……. 평가가 만연하는 세상은 억압이 만연하는 세상이요 굴종이 자연스러운 세상이다. 평가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은 평가할 가치도 없는 세상이다.
4
어느 숲에 금강송 열한 그루가 있었다. 제일 작은 금강송은 저보다 큰 금강송을 보며 투덜거렸다.「쳇 저것들만 없다면 이 숲에서 내가 제일 멋진 나무일 텐데…….」 어느날 나뭇군이 와서 제일 큰 금강송을 베어갔다. 제일 작은 금강송은 생각했다.「이제 열 번째가 된 건가.」 다음날 나뭇군이 다시와서 제일 큰 금강송을 베어갔다. 제일 작은 금강송은 기뻤다.「이제 아홉 번째가 되었군.」일주일이 더 지나고 숲에는 두 그루의 금강송만이 남았다. 여태껏 기뻐했던 제일 작은 금강송은 두려워졌다. 이틀 뒤 제일 큰 금강송이 된 제일 작은 금강송은 베어지고 말았다.
5
중앙일보의 대학순위평가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는 「마음도 받지 않겠습니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평가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평가할 능력이 없는 기관의 평가를 거부하는 것이 멋져보이는 것은 이 세상이 평가에 너무나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의 성명은 잘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6
평가 하기 좋아하는 그대. 그대가 평가 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그대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F'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가? 그럼 평가 하기를 그만 두라. 하는 게 없는 것처럼 보여서 싫다고? 그럼 제대로 된 일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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