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다. 집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오빠(집사람은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부른다)가 읽는 책은 보통사람들은 잘 안보는 이상한 것들이 뿐이야. 그런데 요즘은 나랑 함께 읽을 만한 책도 읽네. 그래서 좋아!” 윽! 내가 괴상한 책을 읽었다니. 무슨 말인지 짐작은 갔지만, 그간 읽었던 책을 다시 뒤져보았다. 서재 가운데 자리잡은 책은 이런 것들이었다. [한서이불과 논어병풍(정민)]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고려대출판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문학의 숲을 거닐다(장영희)] [선비답게 산다는 것(안대회)]. 집사람이 그런 말을 할 법도 하다. 위 책의 저자들은 대부분 나의 은사님이거나 학회에서 만났던 한문학 혹은 고전문학 전공자들이다. 그래서 그 책들 역시 쉽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 것들이다. 집사람 눈에 ‘이상한 책만 읽는 사람’으로 비친 것도 무리는 아닌 듯 하다. 소설이라고 읽은 것도 집사람의 취향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주로 테러리스트, 범죄자, 정신병자, 마법사, 무림고수들을 다룬 책들, 영화로 치자면 액션물에 해당하는 것들을 주로 읽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잔잔한 소설과 로맨틱한 영화를 좋아하는 집사람 눈에는 괴상할 수 밖에.
□ 어느 날 잔잔한 소설이 눈에 들어오다
나는 영화도 주로 [스파이더맨], [판타스틱4] 같은 그냥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선호한다. 영화 보는 데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기 싫다는 치기어리고 막되먹은 생각은 지금도 뿌리 깊다. [혼불] 이나 [토지]도 읽어보려고 시도하였으나 100쪽을 넘기지 못하고 던져버렸다. 그런 선경험 때문에 여류소설가의 글을 거의 읽은 것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달라졌다.(이것도 아마 블로그 시작하면서 일어난 일이지 싶다) 지겨워서 던져버렸던 [연금술사]가 재미났다. 그건 내게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를 읽게 되었고, 역시나 실망하지 않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단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고인의 그 유명한 소설들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참 희안한 일이다.
□ 솔직한 너무도 솔직한 글이 아름답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글을 잘 쓰는구나. 이게 프로작가인가?”하는 생각이 자주 했다. 그런 느낌은 작가의 ‘솔직함’ 때문인 것 같다. 글이라고 하면 적절한 수사와 적절한 감정의 절제와 적절한 비유가 어우러진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내 선입견은 박살났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기뻤다. 박완서 선생님은 보통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솔직하게 나는 이렇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혹시 저런 감정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부끄럽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까지 남김없이 속을 뒤집어 보여준다. 그래서 더 아름다웠고, 눈을 땔 수 없었다. 적어도 수필은 작가 본연의 솔직함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잘난 척하고 싶고, 누가 내 싫다는 소리는 듣기 싫고, 평생을 가저온 허영심을 실토하는’ 그 솔직함은 매력이고 아름다움이었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중략) 늙어 보인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고, 누가 나를 젊게 봐준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은 평범한 늙은이지만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게 하고 싶다.(5)
독자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게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의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점 때문에 밑줄 긋는 일을 기피했다면 그것도 일종의 허영심이었을 것이다. (중략) 남의 밑줄을 보는 게 당시 건방기 많은 소녀에게는 은밀한 쾌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겨우 요 정도의 문장이 뭐가 좋다고 밑줄씩이나, 유치하긴, 하는 우월감까지 먼저 읽은 동무들에게 느꼈을 것 같다. 그런 나는 얼마나 겁쟁이인가. 남이 나를 그렇게 경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밑줄 같은 건 절대로 안 칠 것 따위나 신조로 삼았으니.(154)
□ 지금의 나를 만든 사건이 내게도 있었는가?
작가는 6.25의 경험이 자기 문학을 이끌어간 힘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삶의 방향을 결정한 혹은 글의 방향을 결정한 사건이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던가?' '나의 유난스러울 정도의 가족에 대한 애착은 어디서 왔을까?' 떠올리긴 싫지만,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10년 쯤 되었던가(헤아려보면 몇 년도 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건만 하지 않으련다) 집안 어른들 간에 엄청나게 큰 다툼이 있었고, 치기어린 나도 기름을 한껏 부었다. 그래서 힘들어하는 가족을 보며, 내 가족에 대한 애착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던 것 같다. 6.25와 같은 거창한 경험은 아닐지라도, 내 삶과 글의 방향을 결정지어버린 사건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나는 슬프고 분노하고 비판하는 글은 가급적 쓰지 않는다. 기뻐하고 긍정하고 칭찬하는 글만 쓰고 싶다. 가끔 그런 생각을 어기고 부정적인 생각을 담아내려하면 몹시 고통스럽다. 뭐하러 힘든 세상에 사는 나를 더 힘들게하려 사서 고생을 하겠는가? 안쓰면 그만인 것을. 그래서 스스로를 미화한다는 말도 듣지만, 이건 시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라고 본다. 난 누가 뭐래도 내 행복을 위해 좋은 것만 담아 낼 것이다. 덤으로 내글을 읽는 이웃들도 행복과 따듯함을 느끼고 돌아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2부에는 ‘책들의 오솔길’이라는 재목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서평들이 실려 있다. 거기엔 이런 고백이 있다.
“서평도 독후감도 아닙니다. 책을 읽다가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입니다. 나이 들면서 숨 가쁘게 정상으로 끌고가는 책보다는 도중에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거느리고 있어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는 책에 더 정이 갑니다(183)”
실제로 그 글들을 읽어보면 서평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글 한편에서 10%정도가 서평이고 나머지는 본인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 서평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글이 참 좋았다. 서평의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글이 나온다. 충실한 책 소개일 수도 있고, 재미있게 읽은 부분에 대한 감상일 수도 있고, 책 한권을 읽고 강렬하게 남은 한 단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 한 단어로 삶을 반추하는 글, 그 역시 훌륭한 서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서평에서 신경숙의 엄마는 사라져 버리고 박완서의 엄마만 남아 버린 것이 그 일례다.
□ 알기 전에 작고하셔서 다행일까요?
올해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님. 당시 뉴스가 나올 때는 그냥 '문단의 큰 별이 졌구나' 정도로 잠시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이 책을 읽어갈수록 그의 부재가 슬펐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 ‘너무도 좋아하게 되었더라면 얼마나 마음아팠을까?’ ‘작고한 뒤에 좋아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덜 다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아, 나는 한없이 이기적인 사람이다.)
니나 가라 프린스턴,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를 읽고 (0) | 2011.04.19 |
---|---|
문화유산해설사가 늘 따라올 순 없잖아, [절에서 만나는 우리문화]를 읽고 (0) | 2011.04.13 |
톨스토이의 [노동과 죽음과 병] (0) | 2011.03.29 |
인터넷은 인간의 지성에 대한 재앙이다(3),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0) | 2011.03.28 |
인터넷은 인간의 지성에 대한 재앙이다(2),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0) | 2011.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