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월 25일과 1996년 3월 28일은 내게 특별한 날이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갖는 특별한 날이니, 그다지 특별하지 않을 수도있겠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 날이다. 무슨 날인지 눈치를 채셨으리라. 바로 내가 306보충대로 입소해서 군인이 되고 다시 민간인으로 돌아온 날이다. 일일一日이 여삼추如三秋라고 했던가? 말년 병장시절은 정말로 갑갑하고 지루했다. 그래도 기약이라도 있었으니 참고 버틸 수 있었다. 이제는 그 기억도 까마득하지만.
갑자기 웬 군대 이야기냐고? 어제 모처럼 집사람과 영화를 한 편 봤다. 장훈 감독, 신하균·고수 주연의 [고지전]. 군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 자신의 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대한민국 남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이 아닌가?(빽이 좋아서 군에 가지 못한(?) 높으신(?) 분들은 빼고 말이다.)
[고지전]은 ‘한국전쟁의 마지막 날, 한 뼘의 땅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개처럼 쓰러져 간 젊은이들의 마지막 전투’ 이야기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한 발 더 대한민국 전쟁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영화라고 일단 먼저 평을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고수와 신하균|신하균이야 원래 연기 잘하는 배우라지만, 고수는 제대하고 와서 배우로서 더욱 성숙해졌다.
133분의 상영시간 내내 집사람과 나 둘 다 푹 빠진 채로 봤다. 또, 한국 영화의 몹쓸 단점인 ‘억지 감동’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감동’을 안겨주어서 좋았다. 집사람이나 나나 영화가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바로 졸고 마는 사람인데, 그 긴 시간을 졸지 않고 재미있게 봤으니, 어지간히 까탈스런 관객이 아니라면 만족할 만한 영화다. 극장을 나오며 모처럼 “재미있다”고 의견일치를 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게다가 조조로 봤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만족이었다.
[의형제]의 장훈이 감독을 맡았고, [JSA 공동경비구역]의 작가 박상연이 의기투합하였다. 남북갈등으로 특화된 감독과 작가의 조합이 만들어낸 영화 꽤 괜찮았다. [고지전]에는 그래서 전작들의 모티프들이 살짝 변형된 형태로 드러난다. 예를 들자면, JSA의 초소방문 모티프의 재활용이라던지, 친구 혹은 형제의 갈등과 화해의 구조가 그렇다.
[고지전]은 강은표(신하균 역)와 김수혁(고수 역)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갈등을 만들어내는 인물에는 꼭 원칙주의자가 있게 마련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 속 원칙주의자들이 짜증스러울 때가 많다. 예를 들자면 실미도의 조중사(허준호 역)와 대립하는 김중사(이정현 역)같은 그런 부류들. 물론 원칙주의자들은 스토리 전개상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크린에 자주 나올수록 영화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고지전]에서는 강은표(신하균 역)가 원칙주의자로 나온다. 김수혁(고수 역)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만들어내면서도 최소한의 덜 얄밉고, 덜 짜증스러운 캐릭터를 유지하였다. 감독과 작가가 그런 점을 인식하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그것이 이 영화의 잘된 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위 신일영 역의 이제훈|영화에서 보여준 카리스마에 여러 여자들 넘어가게 생겼다.
영화를 보고 잠시 리뷰들을 훑어보았다. 비판적인 리뷰도 있고 긍정적인 리뷰도 있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비판적인 리뷰에 이런 것이 있었다. “김기덕을 배신한 장훈은 나쁜 놈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북한에 대한 미화가 불쾌했다.” 물론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개인의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니,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다. 그냥 거기에 기대어 내 전쟁영화에 대한 영화관을 말해보련다.
전쟁영화는 크게 두 가지의 메시지를 주려고 한다. 첫째는 전쟁의 참상을 통한 반전의 메시지 전달이다. [람보 1]이나 [태극기 휘날리며]같은 작품이 그 예가 되겠다. 둘째는 전쟁을 통한 영웅 혹은 영웅적인 국가에 대한 찬양이다. 헐리우드 전쟁영화가 거의 다 그러하다. 나는 [고지전]보며 반전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하게 인지하였다. 그럼 된 것 아닌가? 재미있고, 반전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었으니.
감독의 머리 속에 있던 영화가 영화로 제작되면 이미 감독의 것이 아닐진데, 왜 그리 영화 외적인 혹은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문제로 영화를 비난하는가? 사실 여부를 따지고 싶으면 역사책이나 사료를 보면 될 일이고, 감독 개인의 도덕성을 따지고 싶으면 감독에게 욕을 하라. 왜 영화를 걸고 넘어지는가? 그래도 그리 비난해야 한다면, 해라! 그게 무엇이 되었건 감상은 관객의 몫이니.
영화 내내 신세영의 ‘전선야곡’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우리 아버지의 18번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나도 따라 부른 노래라 친숙하였다. ‘전선야곡’이 오케스트라로 연주되어 나올 때, 마지막 전투를 앞둔 남북의 군인들이 함께 노래할 때, 우리의 전통가요도 저렇게 웅장한 울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박칼린이 감수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 영화표 끊어야겠다! 어머니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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