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강의』에서 GDP와 관련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혼자만 알고 있기가 아까워 소개한다. 갈색 글은 『마지막 강의』에서 인용한 것이다.
경제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내가 왜 이 행위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중요하다. 이 질문은 자동화 된 행위의 목적을 상기하게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그 행위를 더 하거나 덜 하거나 그만두게 된다. 인간만이 경제 활동을 한다. "인간이 왜 경제 활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삶을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는 답은 거의 교과서적이다. 문제는 경제활동을 하는 주체가 "나는 왜 경제 활동을 하는가?"란 질문을 거의 잊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잊게 된다.
성장이 경제의 주 목표가 되면 경제적 성공을 재기 위해 개발된 도구가 성장만을 재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계량하는 주된 방법으로 채택된 국내총생산(GDP)은 국민의 안녕에 도움이 되는 거래와 국민의 안녕을 저해한 거래를 구분하는 일 없이 단순히 국내에서 소비한 것의 총합으로 계산된다. 소비자 보호에 앞장서 온 미국의 사회 운동가 랠프 네이더가 말하는 것처럼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게 되면 그때마다 GDP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구급차, 의사, 관, 변호사 등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범죄율이 증가하므로 보험을 더 들어야 하고, 문이나 창문을 잠글 수 있는 자물쇠를 사야 하고, 도둑 경보기를 설치해야 하고, 자위 수단으로 무기를 구입해야 하고, 등등 이 모든 비용이 GDP에 가산된다. 그러나 물론 이렇게 GDP가 오른다고 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성장에 대한 뉴스가 무수히 쏟아진다. 큰 폭의 플러스 성장은 훈장처럼 포장되고, 마이너스 성장은 무슨 재앙인양 보도된다. 언론 보도는 "성장 = 삶의 질 향상"이라는 공식이 당연한 것으로 가정한 듯 하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생산을 해야한다.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자연에서 오는 자원이 필요하다. 그 결과 숲이 파괴되고 땅이 말라버리고 강과 바다가 오염되고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성장 = 삶의 질 향상"이라는 공식은 아주 이상하게 보인다. 성장을 멈추지 못해 멸종한 공룡과 성장을 멈출 수 없는 경제는 별개의 문제인가? GDP에 관棺과 장의사 비용이 포함된다는 생각을 못해봤다. 사람이 많이 죽어서 장의계가 활황을 맞아도 GDP가 상승한다. 재미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재미있다. 이에 관한 장정일의 글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정의를 내려야 할 마지막 용어는 ‘생산물’이다. 나는 이제까지 모든 노동을 유익한 것으로 논해 왔다. … 하지만 가장 양질의 노동도 목적에서는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 즉, 농업처럼 건설적일 수도 있고, 보석세공처럼 무효적일 수도 있고, 전쟁처럼 파괴적일 수도 있다. 자본은 생명에 유용한 어떤 물건을 공급하느냐, 생명을 보호하는 어떤 구조물을 짓느냐?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자본 자체의 증식은 아무작에도 쓸모가 없다. 그런 자본은 아예 없느니만 못하다.(『빌린 책/산 책/버린 책』, 31쪽)
1995년, “발전을 재정의하기”라는 기관에서 GDP 대신으로 “진정한 발전을 측정하기(GPI)”라는 도구를 창안해 냈다. GPI는 수입 분배를 고려하는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에서 더 큰 몫을 얻게 되면 점수를 더 주고, 부자들이 더 많이 받으면 점수를 감하는 식이었다. 가사일이나 자원봉사나 고등교육이 창출하는 가치는 일반적으로 GDP에 가산점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GPI에서는 가산점으로 간주된다. 범죄 때문에 생기는 비용, 자원을 고갈시키는 것, 오염, 환경 파괴, 일회용품 등은 GPI에서 점수를 뺀다.
의도는 좋지만 GPI의 단점도 있다. 문제는 예외 조항의 설정이다. 어떤 것을 넣고 어떤 것을 빼야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자의적인 부분이 반영된다. 예외가 많이 만들어지면 통계수치로서 부적절할 수 있다. 단순히 말해 지저분해진다. 더 큰 문제는 통계를 발표하는 기관에서 그런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GPI를 GDP 수준으로 절대 격상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는 GPI를 불편하게 여길 거대 기업의 압력도 상당부분 작용할 것이다.
1950년부터 2004년까지 GDP와 GPI의 변화를 보면, GDP의 경우 불경기 때문에 가끔씩 떨어질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엄청난 속도의 상향 곡선을 보여 주고 있는 데 비해, GPI는 천천히 올라가다가 1970년을 정점으로 하고 그 이후부터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리 중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거나 우리 자녀들, 취미, 공동체를 위해 여유 있는 시간을 갖지도 못하면서 더욱 오랜 시간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GPI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PI 수치가 1970년을 정점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생산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삶의 질은 오히려 하락하는 현실의 정확한 반영!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느껴왔던 것이 상당히 객관적인 수치로 제시되었다는 것이 큰 의미다. 누군가는 혹은 어떤 기업은 이 수치를 보고 대단히 불쾌할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그 공룡을 넘어뜨려야 지구가 살아남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을. 세계의 지성들의 말과 자본의 주구들이 하는 말 중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우리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성장을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는 공포스러운 말에 굴복할 것인가?
마지막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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