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말콤 글레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를 읽고 감탄을 했다. 수많은 연구 결과와 인터뷰를 근거로 해서 쓴 책이었는데, 과학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글쓰기의 모범이라 할만 했다. <우리에겐 왜 이런 책이 없는가?>라는 자조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 자조감은 나의 과문寡聞 탓이었다. 우리에게도 엇비슷한 책이 있으니, 바로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같은 것. 출판된 지 10년도 더 되었건만, 이제야 내 손에 들었다.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못했다’가 아니라 ‘않았다’다. 나는 괜찮은 책을 만나면 늘 읽기를 늦춘다.) 그중 특히나 흥미로운 부분이 둘 있다. 하나는 ‘프랙털’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좁은 세상’에 관한 것이다.
‘프랙털’이야기부터 하자.(프랙털이란 부분의 구조가 전체 구조를 반복하는 것을 일컫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나무’나 ‘눈[雪]’의 구조를 들 수 있다.) 5살 된 아들놈이 유치원에서 뭘 좀 많이 배우는 모양이다. 요즘 이 놈 입에서 「패턴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가 자주 나오는데, 요즘 유치원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치나 보다 했다.(나는 유치원을 다녀 본 적이 없어서, ‘요즘 유치원’ 운운하기에도 뭐하지만.) 그런데 ‘프랙탈’에 관한 글을 읽고는, <결국 학문이라는 것이 패턴을 찾아서,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자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아들 놈은 벌써 학문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었다.
다음은 ‘좁은 세상’(서너 다리만 건너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연결된다는 이론) 이야기. 최근에 책을 읽다보면 직전에 읽은 책이나 그 책의 저자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언급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 읽은 책이 좀 늘어나다보니 일어나는 현상인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이 현상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좁은 세상’이었다. 책이라는 것이 결국 다른 책들의 또 다른 조합이 아니던가? 그러나 엔간히 유명한 책이나 작가라면 이 책 저책에 자주 언급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단, 내 경험상, 읽은 책의 양이 적어도 1,000 단위는 넘어가야 그런 현상을 접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에 정재승이 직접 발견하거나 깨달은 내용을 기술한 것은 없다. 각종 연구논문을 근거로 대중이 읽기 좋도록 잘 엮어내었을 뿐.(이런 능력이 보통 능력은 아니다.) 책 속에 온전하게 자신의 생각이 토로된 부분을 보면, 연구 결과의 정리이거나, 연구 결과와 연관되는 신변잡사에 불과하다. 책이란 다른 책의 또 다른 조합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읽으면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다. 구슬(각종 논문, 보고서 등)이 많아도, 그걸 잘 꿰어내는 역량을 갖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너는 네 전공인 한문학을 활용한 대중적 글쓰기를 하고 있느냐?> 결코 그렇지 못하다. 말로만, 한문학은 현실과 너무 먼 학문이니, 먹고 살려면 한문학도 대중화해야한다느니 떠들기만 했었다. 순간 떠오르는 책이 몇 권 있다. 그것을 잘 활용해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해볼까나?
과학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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