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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司諫 범중엄范仲淹께 올리는 편지

잡동사니

by 빈배93 2013. 7. 3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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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재계하옵고 사간司諫께 편지를 보냅니다. 지난달 공문을 전달하는 관리로부터 보고를 받았사온데, 선생께서 진주陳州에서 조정으로 불려와 사간에 제수되었다고 하더군요. 곧바로 축하 편지를 쓰려하였사오나, 일이 바빠 우물쭈물하다가 쓰지를 못하였습니다.

 

   사간은 칠품의 관직이니, 그 직위를 얻은 것이 선생께는 기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기쁜 마음으로 하례를 드리는 것은 사관이란 직책이 천하의 득실, 당대의 여론과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각종 관직에 있는 사람 - 고위 관원으로부터 각 부처의 전문 관원과 외직에 있는 군현郡縣의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 이 높은 관직과 큰 직분으로 각자의 소신을 실천에 옮기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군의 경계를 넘어서고 현의 경계를 넘어서면 수장이 비록 현명할지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이는 그 관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요, 인사를 맡은 관리가 군사에 관한 일을 할 수 없고 연회를 맡은 관리가 제사에 관한 일을 할 수 없으니 이는 그 직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득실이나 백성의 이해나 사직의 대계와 같이 관심은 있으나 어디에 특별히 관련된 일이 아닌 경우에는 재상만이 시행할 수 있고 간관諫官만이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옛 것을 배워서 치세의 도를 품고 있는 선비가 벼슬에 나아갈 때, 재상이 될 수 없으면 반드시 간관이 됩니다. 간관이 비록 그 직위는 낮으나 하는 일은 재상과 대등합니다. 천자가 "불가不可"라 하는데 재상이 "가可"라 하고, 천자가 "그렇다"고 하는데 재상이 "그렇지 않다"고 하니, 조정에 앉아서 천자와 가부可否를 판단하는 자가 바로 재상입니다. 천자가 "옳다"고 하는데 간관이 "그르다"고 하고, 천자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하는데 간관이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대궐 앞의 계단에서 천자와 시비를 다투는 자가 바로 간관입니다. 재상은 직위가 높아서 소신을 실행할 수 있고, 간관은 직위가 낮아도 소신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간관의 말이 받아들여지면 간관의 소신 또한 실행됩니다.  고위 관원, 부처의 전문 관원, 군현의 책임자로서 하나의 직무만을 주관하는 자는 하나의 직무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됩니다. 반면 재상과 간관은 천하의 모든 일과 관계를  맺고 있어서 천하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재상과 고위 관원으로부터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는 관계 부처의 질책을 받으면 그뿐이지만, 간관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군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관계 부처의 법령은 한 때만 효력을 발휘하지만, 군자의 비난은 서책에 쓰여져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서 백 대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으니 심히 두려워할만 합니다. 일개 칠품의 관직이 천하의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백 대의 비난을 두려워해야 하니 그 일이 어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재능있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근래에 선생께서 진주陳州에서 부름을 받으시자, 낙양의 사대부들이 "내 범중엄 군을 알고 그의 재주 또한 잘 알고 있네. 그가 오면 어사御史가 되지 말고 만드시 간관이 되어야 하네."라 하더군요. 어명이 내려오자,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낙양의 사대부들이 "내 범중엄 군을 알고 그의 현명함 또한 잘 알고 있네. 훗날 천자 폐하 앞에 서서 정색을 하고 곧은 말을 하면서 논쟁을 일삼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은 필시 다른 사람이 아닌 범중엄 군일 걸세."라 하더군요. 선생께서 사간의 직책을 받으신 이후로 학수고대하며 무슨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는데 끝내 아무 소식이 없어서 저 혼자 이런 미혹된 생각을 하였습니다. <낙양의 선비들이 어찌 선생이 명을 받기 전에는 미리 헤아릴 수 있었으면서 선생이 명을 받은 이후의 일은 헤아리지 못할 수 있겠는가? 선생께서는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감행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 한유가「쟁신론爭臣論」을 지어서 간의대부諫議大夫 양성陽城이 대담하게 곧은 말을 하지 않음을 비판하였기에, 양성은 마침내 대담하게 곧은 말을 잘 하는 것으로 명성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가 양성이 대담하게 곧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한유가 양성의 뜻을 모르고 망령되이 비판하였다고 생각하였으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유가 「쟁신론爭臣論」을 지을 당시 양성이 간의대부가 된 지 이미 5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2년이 지날 동안 육지陸贄의 현명함이나 칭송하고 배연령裵延齡이 재상이 되는 막기 위해 임명장이나 찢으려 했을 따름입니다. 그가 한 일은 기껏해야 그 둘 뿐이었습니다. 덕종德宗 때에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관리 임용에 금품이 오가고, 반란을 일삼는 장수와 전횡을 일삼는 대신이 널려 있었으며, 덕종은 시기심이 강하여 소인 나부랭이나 임용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어찌 한 가지 일도 말하지 않고 칠 년을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당시에 어찌 배연령의 재상 임용을 막고 육지의 현명함을 칭찬하는 일보다 급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아침에 사간에 임명되어 저녁에 상소를 올려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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