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1』, 글·그림 박시백, 휴머니스트, 2009.
박시백은 잘나가던 신문사 만화작가였다. 어느 날 사극을 보다가 역사에 무지한 자신을 발견한 순간,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한 컷 한 컷 만화로 그려내었다. 출판계약을 한 상태도 아니었다. 아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참 대책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대책 없음’이란 소심한 필부인 필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일뿐, 어쩌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 새 길을 찾는 구도자의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박시백은 운 좋게도 ‘휴머니스트’란 출판사를 만났다고 했다. 그 운이란 그를 피할 수 없는 필연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 필연이어야 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1』은 그렇게 2005년 4월 11일에 세상으로 나왔고, 2009년 5월 1일부로 10쇄가 발간되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1』은 고려 말에서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완성되는 순간까지의 이야기이다. 이 때는 개혁과 혁명으로 점철된 시기이다. 작가 박시백의 개인적 혁명과 맞물려서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특징은 작자 후기에 실린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작업을 하는 것은 사실 꽤 신명나는 일이었다. 동일한 처지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어찌했을까 하며 상상하다 보면 사건이 더 실감나게 읽히고 인물들의 새로운 면이 보이곤 한다. 성공한 무장에서 성공한 정치지도자로, 나아가 새 왕조의 창업자로 성장해 가는 이성계의 변화, 40이 넘은 나이에 청춘 시절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함주 막사로 찾아가는 정도전의 기상, 한 가닥 가능성에 올인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정몽주의 투지, 무능과 겁쟁이의 대명사라는 오명을 썼지만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공양왕……. 나로서는 인물들의 재발견이었다.
자신의 암살 음모를 들은 포은 정몽주의 생각에 대한 박시백의 추측이 마음에 남는다.
변중량이란 이가 있었다.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사위여서 일가이긴 하지만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스승의 신변을 염려한 그는 그 길로 달려가 정몽주에게 알렸다. 음모를 전해들은 정몽주는 돌연 이성계의 집으로 병문안을 간다. 다시 정리해보자. 상대는 고려의 군권을 한 손에 틀어쥔 최강의 실력자. 그런 이성계를 상대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그가 결코 무리수를 둘 리 없다는 판단을 믿어서였다. 그렇다면 애당초 이성계랑 맞서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무리수든 뭐든 쓰겠다는 결심이라면, 그깟 경호원 몇 명이 그걸 어찌 막을 손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고 어디 어떻게 흘러가나 한 번 보자.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절친한 벗이자 현재로선 적대적인 두 당의 영수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환담하는 사이, 이방원네들은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1392년 4월. 개경 선죽교. 그의 나이 56세였다.
개혁과 혁명이란 것이 종기를 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불합리를 개혁하려한 공민왕·신돈의 노력과 어떻게든 고려왕조를 지속시키려한 정몽주의 노력은, 조선왕조의 입장에서는 역설으로 고려왕조의 재생 불가능을 확인시켜준 계기였다. 공민왕의 개혁은 종기를 더 곪게 해서 낫게 하는 고약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농익은 종기와 같았던 말기의 고려에 가해진 간단한 터트림. 그것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일 터이다. 역사의 흐름을 자신의 방향으로 터트리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옵션이다.
선죽교에서 쏟어진 피를 끝으로 고려는 막을 내렸다. 조선이 서고, 그 조선마저 막을 내린지 백 년도 더 되었다. 정몽주 한 사람이 고려와 조선이라는 나라만큼이나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은 정몽주의 때문일까? 박시백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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