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상인의 딸 정경鄭卿이 창기唱妓로 떨어진 것도, 천인賤人 수베테이가 몽고의 천호장千戶將으로 오른 것도, 모든 것이 한 순간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참 열심히도 살았다. 창기唱妓는 대장경 불사로 부처님께 갔을 것이고, 천호장은 칸의 명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것도 역시 한 순간이었다.
침략한 자와 침략당한 자가 대장경판에 한 줄 간기刊記로만 남았다. 거기에는 부처도 없고, 칸도 없다. 모두가 제 의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 몸부림과는 상관없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칸은 창기를 사랑했다. 창기는 모든 것이 한 순간에 결단나는 것이 삶이라 생각했다. 창기는 칸의 사랑을 거부했다. 창기는 대장경판 모퉁이에 한 순간 왔다가 한 순간 가버린 사랑의 흔적을 간기로 남겼다.
"高麗國 江華京 信女 鄭卿 刻爲蒙人速別額怡
(고려국 강화도 여자 정경은 몽골인 수베테이를 위해 이 경판을 새깁니다.)"
간기에 쓰여진 내용은 전후 사정이 없어 지극히 간략하다. 어떤 시절 어떤 삶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 소설의 임무라면, '려인麗人'은 그 임무에 충실한 소설이다. '려인麗人'은 '고려인' 정경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정경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었던 '수베테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조정래의 '대장경'과 같은 시기의 이야기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해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부슬부슬 비내리는 날 해인사를 찾아가면 더 좋을 듯하다.
하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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