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시인 안현은 몽골 귀족에게 빼앗긴 아내를 찾으러 수만리 초원을 건넜다. 어여쁜 아내는 이미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사내의 아이를 놓았고, 그 아이에게 애정을 쏟고 있었다. 아내를 빼앗길 때는 너무나 무기력했고, 아내를 다시 찾았을 때는 너무나 늦었다. 안현은 너무나 늙고 보잘 것 없었고, 아내는 귀족의 부인이 되어버렸다. 아리따웠던 아내는 안현에게 말을 한다.
"내 아들 우량카이가 성인식을 치르면 지다이 가문은 다시 영지를 얻을 수 있어요. … 그래요. 하지만 남편도 보호하지 못한 나를 지켜주고, 들쥐를 잡아먹는 당신을 건져준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지다이는 늙기는 했지만 지혜롭고 도량도 넓은 분이었어요. 당신이 나의 옛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해요?…잊지 않았어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지금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안현은 과거에 몽골 귀족에게 아내를 빼앗겼고, 이제는 그 아내였던 여인에게 삶의 의미를 빼앗겼다. 수만리 고행을 버티게 해주었던 실오라기 같은 희망도 꺽였다. 그날 밤, 안현은 과거의 아내를 죽인다. 붙잡힌 안현은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글 한 편을 남긴다.
"아내는 아름다웠고 노랫소리도 곱고 빼어났지요. 요즘도 잠자리에 누우면 그 노래가 귓전에 울립니다. 그러면 연뿌리 끊기듯 애간장이 끓고 연밥 알인 양 눈물이 방울방울 흐릅니다."
내 아내가 언제까지 내 아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무슨 이유에서건 떠나버린 아내는 애틋한 아름다움으로 착색되기 마련이다. 그 애틋한 아름다움을 지금으로 가져만 올 수 있다면, 시인의 별은 가슴에서 현재형으로 반짝일 것이다. 끝을, 최악을, 가정한다면, 되새긴다면, 현재는, 행복하다, 행복할 수 있다.
하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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