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를 담아놓고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 바로 초가 돼. 꼭꼭 닫아두고 오래 오래 묵혀야 신의 눈물이 된단 말이지. 된장도 그렇고, 김치도 그렇고. 하여튼 그런 과정을 거친 음식 중에는 'Good!'이라고 감탄할 만한 것들이 참 많아. 걔네들이 무슨 인격이나 생각을 가진 건 아니지만, 고독과 침묵을 통해 그 맛을 완성한 거라고 봐.
융이라고 유명한 심리학자가 있어. 이 사람이 용어를 하나 만들었어. ‘테메노스’라는 건데, 원래는 ‘고대에 희생제의犧牲祭儀가 치러지던 신성한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야. 그걸 융이 ‘개인의 내면에 만들어 가지는 심리적 공간’이라는 의미로 쓴 거야. 그게 있어야 갈등이나 문제를 담아두고 소화시킬 수 있다고 해. 쉽게 말하자면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테메노스를 기르냐는 거지. 거기에 대해서 융이 뭐라고 했는지 나는 몰라. 대신 나는 법정 스님의 글이 떠올랐어.
우리 시대의 영적인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도 일찍이 말했다.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홀로일 때 비로소 세상에 살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 있으리라. 홀로 있을 때 완벽한 생동과 협동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56쪽.)
그거야. 포도주처럼, 된장처럼, 김치처럼. 혼자서 숙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 누구에게는 지배적인 관계로 누구에게는 종속적인 관계로, 다들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만들고 살잖아? 그럼 숙성이 안 되고 그냥 초가 된다는 거지. 철저하게 혼자 지내보는 거야. 연락 다 끊고. 그러면서 나의 예전 생활과 현재의 나의 마음을 잘 살펴보는 거지. 그게 다야. 그러면 자아가 굳건해진다 말이지. 혼자 밥 먹으러 갈 수 있어야해. 그러지 못하면 내가 나를 규정하지 못하고, 내 관계가 나를 규정해버리지. 관계도 물론 중요는 해. 하지만 나는 없고 나의 관계만 있다면 그게 더 문제란 말이지. 소설가 김형경이 몸소 행했던 ‘자발적 왕따’가 그런 차원의 것이야.
김형경의 『만 가지 행동』을 읽으며 떠올린 생각이야. 이 책에는 마음에 약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수두룩해. 참 괜찮은 책이야. 온 가족에게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일단 우리 집사람에게 권했는데, 읽겠데. 흐뭇한 일이야.
만 가지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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