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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도시, 뒤집어 보는 건축

독서

by 빈배93 2011. 8.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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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가는 경주군 외동읍 입실리이다. 경주시와 울산시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데, 내가 태어난 곳이고, 시골이라는 것을 어려서 몸소 체험한 고향 같은 곳이다. 내 고향은 부산의 서면이다. 워낙 유명한 유흥가라, 고향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시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내 마음속의 고향은 입실이다.

 

얼마나 깨끗한 환경이었는지, 밤이면 반딧불의 빛이 선명하고,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지는 듯하였고, 시내에 천렵을 나서면 서투른 초등학생의 솜씨로도 1시간이면 한 주전자 가득 송사리리며 피라미들을 잡아올 수 있었다. 시내에는 하늘로 늘씬하게 뻗은 수양버들이 하늘거렸다. 가위바위보를 하며 아카시아 잎을 먼저 때어내기를 하며 놀던 그런 기억도 있다.

 

외가집의 뒤로는 아기장수의 전설을 간직한 아기봉산이 있었다. 그 산에는 수곡사와 건국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물맞이를 하는 곳이 있었고, 거기서 파는 가락국수 한 그릇을 먹는 재미에 부모님을 따라 신나게 산을 올랐던 추억이 아련하다.

 

초등학교 6학년 쯤이었던가? 완전한 시골 마을이었던 외가 동네에 생뚱맞은 아파트가 한 채 떡하니 들어섰다. 어린 내 생각에 시골에 저런 건물을 지어도 되나?’하고 갸우뚱하면서, 저 아파트 때문에 나의 외가 동네가 무척이나 흉하게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하였다그것을 시작으로 울산-주간 고속국도가 마을 뒤를 지나가게 되었고, 공장이 들어섰고, 시내는 말라버려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는 갈 일도, 추억할 공간도 사라져버렸다.

 

외할어버니 외할머니의 무덤도, 도로가 나면서 내년쯤이면 이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외삼촌은 화장을 하겠다고 하니 이제는 영영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슬프다! 내 마음의 고향이 그렇게 지워져간다.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읽어버렸는지 한 번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껏 꽤나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면서도 건축학과 관련된 책은 아직까지 한 권도 없었다. 계획적인 독서와도 거리가 먼지라 굳이 건축과 관련된 책을 일부러 읽지도 않았고, 참 오래도 우연히 접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다 순전히 우연히 도서관에 갔다가 눈에 띄어서 읽게 된 책이 양상현의 [거꾸로 읽는 도시, 뒤집어 보는 건축]이다.

 

아마 첫 몇 페이지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면 일찌감치 접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으나,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어린시절 외가에 지어진 아파트에 대한 나의 생뚱맞음음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도 이책을 통해 대략은 짐작하게 되었다.(이책에 의하면 그것은 시골집들 사이의 조화를 해친 막무가내식의 건축 때문이었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건축과 관련된 전문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작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건축의 뒤편, 혹은 건축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시대와 문화는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건축학자의 시각으로 본 시대와 문화는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어린 시절 내 외가에 불어온 개발과 그렇게 사라져간 나의 추억을 떠올렸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초록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는 문제이니 굳이 언급하지는 않는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

 

* 인간의 모든 행위는 구체적 공간에서 일어난다(5)

 

* 이 책은 건축 해설서건축 비평서가 아니다. 오히려 건축학에서는 다루지 않는 건축의 뒤편, 혹은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주목의 대상이며, 일상의 다양한 모습들 속에서 시대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6)

 

* 어느 도시를 그곳답게 하는 것, 그 장소에 울리는 건축으로 서로를 닮게 하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모범이 되어 그 곳의 풍경을 만드는 일은 건축에 주어진 진지한 과제다.(22)

 

* 도시의 역사 속에서 건축이 오래도록 시간과 세월을 수용하며, 바위에 돋는 이끼처럼 자연스럽게 구축되어 가는 일, 그렇게 만들어지는 도시의 아름다움은 더할 나위없이 그윽하다. 이 도시들에서 건축물들이 서로 기대어 만들어내는 것은 악다구니가 아니라 잘 다듬어진 화음이다. 이러한 거리는 늦은 포장마차, 오래 사귄 벗들에게서 말없이 번져 나오는 낮은 웃음소리처럼 여유롭다.(24)

 

* 조화로운 닮기는 우리의 전통에서는 아주 익숙한 방법이다. 한국 건축이 지닌 전통적 미덕의 하나로 손꼽히곤 하는 자연을 닮은 건축, 자연스러운 공간의 구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집은 마을을 닮고 마을은 뒷산을 닮는다. 건축은 풍경이 되고자 하고, 풍경은 기꺼이 건축을 품는다.(24)

 

* 부산 범어사역 출입구. 인근의 문화유산의 기꺼운 참조다.(47)

 

* 학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층건물이 들어서면 기억으로 이어진 우리의 개인사도 터전을 잃고 만다. 추억할 장소를 잃은 동창회는 쓸쓸하다.(129)

 

* 모든 건축물에는 시대와 문화의 흔적이 담긴다.(134)

 

* 도시 내 문화 기반시설이 빈약한 상황에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공공 전시시설은 국립현대미술관은 대중의 자유로운 접근과 관람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지와 형태의 구성이 폐쇄적·제한적이다. 이것은 문화 기반시설의 입안자들이 시민의 시점이 아니라 소수 문화 귀족의 시각을 따랐음을 보여 준다.(137)

 

* 진정한 문화는 개방과 자유를 그 생명으로 한다.(139)

 

* 문화시설의 계획에서 제일 먼저 고려할 대상이 시민이라 할 때, 이들의 자유로운 접근과 예술·문화 활동을 담는 창조적 변용이 가능한 마당이라는 점은 이곳이 문화공간으로서 갖는 커다란 매력이다.(140)

 

* 이른바 고급문화를 담는 건물일수록 더욱 자유롭게 열려야 한다. 그 문화를 즐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들까지 쭈뼛거림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열린 건축을 만드는 일, 그것은 건축가의 몫이다.(142)

 

* 안개 낀 호수 저편에 줄지어 선 러브호텔은 인상파의 풍경화 속에 난데없이 끼어든 춘화를 떠오르게 한다.(149)

 

* 저마다의 생활양식이 역동적으로 얽혀 만 가지 표정을 연출하는 것, 그리고 풍부한 삶의 층위가 빚어내는 다양성이야 말로 도시를 도시답게 하는 것이다. 잘 짜인 생태계가 그러하듯 도시 역시 시간과 장소의 다양한 조합을 살아내는 구성원들의 활기로 유지되는 생명체다. 도시에 사는 이가 어디 정치가와 직장인과 CEO뿐이랴.(158)

 

* 세계화란 전 세계를 자신의 시장으로 포획하려는 자본의 제국 지향적 시도에 다름 아니다. 어딜 가도 똑같은 도시, 보편적 합리성을 가장한 기계적 획일화로 도시의 지역성은 소멸되며, 도시에서 목마르게 그리운 인간적 표정은 점점 더 찾기 힘든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182)

 

* 예로부터 권력은 사회통합의 유용한 장치로서 또한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의 축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 지지기반이 허약할수록 더욱 심화되어 광적인 집착으로 나타난다. 영속할 듯 보이는 거대한 덩어리의 기념비적 건축물은 권력자의 정치적 빈곤에 대한 역설적 고백이다.(186)

 

* 돌이켜 보면 과거의 시장이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만은 아니었다. 장터는 사람을 만나는 마당이었고 사당패의 난장이 벌어지는 무대였다. 오늘날의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에서도 시민의 삶과 휴식을 배려하는 자리가 열리기를 소망한다.(203)

 

* 경제 유통의 기저를 담당해 온 재래시장은 그 경제적 구실을 차치하고라도 다양한 공간 구성과 흥미로운 짜임으로 혼잡함과 지저분함을 뛰어넘는 다양성을 도시에 제공한다.(211)

 

* 각 도시마다 재래시장의 정비가 한창이다. 낙후된 환경, 거래 질서의 혼란 등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 그러나 고층·고밀화된 단일 건물로 통합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재래 시장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완하면서도 길과 매장이 흥미롭게 얽혀 있는 저잣거리의 활력을 보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212)

 

* 개발의 목표가 정녕 무엇인가. 경제의 활성화인가? 투자자본의 이윤 보장인가? 아니다! 정책행위의 최종 목표는 시민 공공의 복리여야만 한다.(234)

 

* 불량지구 정비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달동네가 아파트촌으로 변모되었지만, 정작 경제력이 있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곳의 주민은 주거비의 상승을 견디지 못해 도시 외곽으로 쫓겨 갔다. 일반적으로 재개발지구의 재정착률은 10%를 밑돈다. 막대하게 투자된 도시 기반 시설자금이 도시 저소득층을 강북에서 축출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237)

 

* 원주민의 재정착률이 1020% 정도에 불과하다면, 이는 가진 자가 더 많이 갖는 재테크의 수단이자 건설자본의 사업 대상에 불과하지 않은가.(250)

 

* 건설자본이 투기적 수익을 노리는 대규모 아파트를 개발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자신의 환경을 안전하고 쾌적하게 바꾸어 나가도록 체계적으로 보조를 했어야 한다.(251)

 

* ‘삶의 질은 밀도에 반비례하여 열악해진다.(311)

 

* 근대화에 따라 많은 것이 사라졌다. 직선이기만을 고집하는 신작로앞에서 숨바꼭질하던 구부정한 골목도, 마을 앞 당산나무도, 서낭당도 없어졌다. 고속철도가 뚫리고 댐이 건설되니 국토의 종합적 개발이라지만, 그 치밀한 경제성의 논리로 우리 역사와 문화가 수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 침묵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315)

 

* 내셔널 트러스트운동은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화가 야기한 훼손과 파괴에 대항하여,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증여를 통해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자원과 문화자산을 확보함으로서 모두를 위해, 영원히공동의 가치를 지켜 나가고자 하는 시민 주도형 환경운동이다. 1895년에 발족된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는 14만 에이커의 호수와 1,217개의 농장이 포함된 약 57만 에이커를 확보, 토지의 1.5%, 해안지역의 17%에 이르는 아름다운 자연을 소유함으로써 최대 토지소유주로 성장하였으며, 250만 회원이 가입해 영국의 대표적 국민운동으로 자리잡았다.(316)

 

* 조끼 주머니가 비록 작아도 회중시계, 동전에서부터 열쇠꾸러미까지 담아내듯이 시민의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쌈지공원은 도시의 요긴한 휴식공간이자 문화공간이 된다. 공원 한편에서 전시회가 열리는가 하면, 다른 귀퉁이에서는 거리의 악사나 화가, 마임이스트가 제 흥에 겨워 공연에 열중하고 있다. 브라질의 골목 어디에서나 축구하는 아이들을 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듯 문화는 이렇게 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다.(321)

 

* 파출소의 자투리 공터에 만들어진 미니 동물원도 있다. 서울 노원 경찰서 상계3동 파출소에는 경찰관들이 자투리 공터를 직접 가꾸어 주민에게 개방하였다. 작은 동물원 축사를 만들어 오리, , 토끼 등을 기르고 연못도 꾸며놓아 이곳은 주민의 쉼터이자 어린이들의 자연학습장이 되었다.(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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